‹ 목록으로 문주님, 제가 수라라뇨

2화

다음 날 아침, 산문 앞에 모인 인원은 서른 남짓이었다. 생각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 동틀 무렵의 공기는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가 흩어졌다. 견습들 특유의 긴장한 얼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검집을 몇 번이고 고쳐 매는 손, 애써 태연한 척하는 눈빛. 다들 처음 겪는 대규모 토벌이라는 걸 온몸으로 티 내고 있었다. 나는 그중 낯익은 얼굴 셋을 발견했다. "언니!" 강서아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활기찬 목소리가 산문 앞의 냉랭한 공기를 조금 밀어냈다. 저 웃음은 여전하구나. 싸움터에 나가는 사람 얼굴이 아니다. "오랜만이네." 나는 짧게 답했다. "오랜만은 무슨, 지난달에도 봤잖아요." 임도윤이 끼어들었다. 뚱한 표정이지만 눈빛엔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 저 표정도 여전하고. "그새 또 얼마나 늘었을까, 궁금해서." 조은채가 웃으며 검집을 톡톡 두드렸다. 말투는 가볍지만 눈은 진지했다. 얘는 이럴 때 제일 무섭다. 셋 다 나보다 한 살 어리다. 견습 동기이면서도 유독 나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검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좀 더 미친놈처럼 굴어서일까. "근데 진짜 서른 명이나 모였네요." 서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정규 부대급인데."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도윤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규모가 크다던데." 서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로 언니가 지휘하는 거예요?" "그렇게 됐어." "불안하지 않아요?" "별로." 짧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불안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앞섰다. 대규모 토벌이라면 그만큼 강한 놈들이 나올 거다. 오랜만에 제대로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게 이상하다는 걸 나도 안다. 남들은 이럴 때 두려워한다는 것도 안다. 근데 나는 그냥 신이 난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언니 얼굴 보면 알아요." 은채가 픽 웃었다. "완전 소풍 가는 얼굴인데?" "소풍은 무슨." "아니, 진짜로. 눈이 반짝반짝해요." 부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서 도윤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나무 냄새, 새소리,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른 명의 발소리가 뒤섞여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길은 완만했고, 다들 아직 여유가 있었다. 누군가 농담을 던지면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이 산길을 따라 퍼졌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나쁘지 않다. 긴장한 채로 산을 오르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언니, 어머니 얘기 좀 해줘요." 한참을 걷다가 은채가 불쑥 물었다. "뭘." "머리색, 눈색, 다 어머니 닮은 거라면서요."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병이었는지 사고였는지, 아버지는 자세히 말해준 적이 없다. 다만 그녀가 남긴 건 이 색뿐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남들과 조금 다른 눈동자. 어릴 때는 그게 놀림거리였고, 커서는 그냥 특징이 됐다. "검을 잘 다루셨대." 짧게 말했다. "그것 말고는 나도 잘 몰라." "진짜 그것뿐이에요?" 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가 별로 말을 안 하셔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어봐도 대충 넘기시고. 그래서 그냥 안 물어." 동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괜히 물었나 싶은 표정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걸었다. 사실 나도 궁금할 때가 있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검을 쥐면 어떤 얼굴을 했을까. 근데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쓴 적은 없다. 없는 걸 붙잡고 있어 봐야 뭐가 남나. "저기, 언니." 도윤이 옆으로 다가왔다. "수라라는 별명, 진짜 싫어해요?" "당연하지." "근데 왜요? 강하다는 뜻이잖아요." "강한 거랑 미친 거랑은 다르잖아." 나는 대답하며 검집을 고쳐 쥐었다. "난 그냥 검이 재밌는 사람일 뿐이야." "근데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던데." 도윤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토벌 때도 그렇고, 언니 싸우는 거 보면... 좀, 그, 즐거워 보인달까." "즐거우니까."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도윤이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 반신반의가 섞여 있었다. 다들 그런 얼굴을 한다.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은 내 눈을 보고 다시 판단하는 것 같은. 그 눈빛이 뭘 찾고 있는지 나도 안다. 괴물의 흔적, 뭐 그런 거겠지. "됐고, 걸음이나 재촉하지." 나는 화제를 돌렸다. "해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 도착해야 해." "네네." 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보폭을 맞췄다. 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처음엔 그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수록 확신이 짙어졌다. "어, 이상하네." 서아가 코를 킁킁거렸다. "비린내 나지 않아요?" 나도 맡았다. 피 냄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더 짙고, 더 눅눅하다. 마치 오래 고인 물웅덩이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고. "저도 맡았어요." 은채가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거 뭔가... 짐승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숲 사이로 붉은 기운이 옅게 감돌고 있었다. 어제 산봉우리를 물들이던 그 색과 닮아 있었다. 그때는 멀리서 봤지만, 지금은 바로 눈앞이다. "이거..."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안개라기엔 너무 진하고, 연기라기엔 냄새가 다르다. 공기 자체가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언니, 이거 진짜 이상해요."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평소의 뚱한 말투가 아니라 진짜 경계하는 어조였다.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산이 조용해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새소리도,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발밑에서 부서지던 낙엽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검집에 손을 얹었다. 등 뒤로 서른 명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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