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게임 만렙 심판자

2화

눈을 떴을 때 신진우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서 있었다. 바닥도 하늘도 구분이 안 됐다. 온통 회백색이었다. 발밑을 내려다봤다. 그림자가 없었다. 손을 들어봤다. 그림자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혼잣말이 허공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메아리조차 없었다. 소리를 삼키는 공간이라니. 신진우는 팔뚝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꿈은 아니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성별을 특정할 수 없는,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음색이었다. 너는 신진우. 신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말하는 주체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나는 이 세계의 진신이다. 대답과 동시에 형체가 어렴풋이 맺혔다. 사람 모양 같기도, 빛 덩어리 같기도 한 것이 눈앞에서 일렁였다. 윤곽이 계속 흔들려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너희 세계 표현으로는 신, 정도로 부르면 된다. 형체가 말했다. 신진우는 잠깐 침묵했다. 대학 합격한 지 이틀 만에 신을 만나는 인생이라니. 이런 전개는 소설에서도 안 써먹는데. 지금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은요. 1,024명 실종됐다던데. 형체가 살짝 흔들렸다.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 정보를 이미 알고 있군. 뉴스에서 봤어요. 숫자가 딱 떨어져서 이상하다 싶었죠. 보통 이런 건 999명이나 1,000명 이런 식으로 끊어야 하는데. 1,024라는 숫자는 딱 2의 10제곱이었다. 누가 일부러 맞춘 것처럼. 너는 그중 유일하게 먼저 불려온 자다. 나머지 1,023명은 아직 이 공간에 닿지 않았다. 왜 저만요. 네가 가진 지식 때문이다. 형체가 손짓 비슷한 것을 했다. 허공에 지도가 펼쳐졌다. 대륙의 윤곽, 강줄기, 산맥의 배치. 신진우의 눈이 커졌다. 이거… 무릉 온라인 맵이잖아. 너희가 게임이라 부르는 그것의 지리가, 이 세계의 실제 지형과 완벽히 일치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눈앞의 지도는 너무 정확했다. 왕국의 위치, 산맥의 이름, 심지어 던전의 배치까지. 신진우가 텍스트로만 외웠던 그 세계였다. 동쪽 끝에 홍련산맥. 그 아래 청화왕국. 북쪽으로 가면 얼음골, 남쪽으로 가면 사막지대. 3년을 밤새워 파고들던 게임이었다. 공략 랭킹 1위 먹으려고 잠도 줄여가며 뒤졌던 그 게임. 그런데 그게 진짜였다니. 신진우의 손이 떨렸다. 지도 위 한 점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던전 위치까지 똑같은데요. 1층 보스 몹 스폰 위치도, 2층 함정 배치도. 이거 제가 공략집 쓸 수준으로 외운 건데. 형체가 잠시 침묵했다. 네가 얼마나 정확히 아는지 확인해야겠군. 그럼 저는 뭐, 예언자 같은 거 하라는 겁니까. 나는 아직 너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 형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뭐라고요? 지식이 일치한다고 해서 네 의도까지 선하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신진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신이 자기를 못 믿는다는 소리를 듣는 인간이 몇이나 있을까. 이거 나중에 누구한테 자랑도 못 하겠네. 그럼 뭘 어떻게 증명하면 되는데요. 지도 더 그려드릴까요. 아니면 몬스터 스탯이라도 읊어드려요? 증명은 필요 없다. 심판이 대신할 것이다. 그럼 저 여기서 뭐 하라고 부른 겁니까. 너에게 먼저 자격을 주려 한다. 다른 1,023명보다 앞서. 자격이요. 그거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형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나쁜 쪽인가 본데. 형체 뒤로 문이 하나 열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저건. 심판의 방이다. 네가 어떤 자인지, 이 세계가 판단할 것이다. 붉은빛이 점점 진해졌다. 문틈으로 뭔가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신진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잠깐만요. 심판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는 건데요. 시험이라고 해두지. 시험이요. 필기입니까 실기입니까. 형체가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확실히 웃는 것 같았다. 곧 알게 될 것이다. 신진우의 다리가 저절로 그 문 쪽으로 끌렸다. 의지와 상관없었다. 이거 뭐야. 발이 왜 이래. 잠깐, 저 아직 준비 안 됐는데. 설명이라도 좀 더 해주시면 안 됩니까. 저 죽는 거 아니죠? 준비는 필요 없다. 너는 이미 선택되었으니까. 붉은빛이 신진우의 발끝을 삼켰다. 그다음 다리, 허리, 가슴 순으로. 야, 이거 진짜 잠깐만. 나 아직 아무것도 몰라. 문이 신진우를 통째로 삼켰다. 깜깜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심판이 시작됩니다.] 신진우의 눈앞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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