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슬을 부수는 주먹

5화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하고 되묻자, 윤서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기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시종도 호위도 없이 왕녀가 이렇게 혼자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나는 일단 경계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이 여자가 얼마나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인지 짐작이 갔다. 왕녀라는 신분에 걸맞은 화려함은 옷차림에서만 드러났고, 걸음걸이나 표정 관리는 오히려 궁정보다 전장에 익숙한 사람처럼 절제되어 있었다. '이 여자,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인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복전님 같은 인재가 국경 전선에서 마물이나 상대하며 소모되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제 직속 호위로 들어오신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약속드릴 수 있어요." '대우라... 뭐, 좋은 밥이나 넓은 방쯤 되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녀의 제안 뒤에 숨은 계산을 읽어보려 애썼다. 요컨대 이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나라는 예상 밖의 변수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두려는 시도로 보였다. 애초에 국경 전선에서 마물 상대하는 게 아깝다는 말부터가 이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 나라 인재였다고. 목걸이 하나로 목줄 채워놓고 부려먹는 처지에, 인재씩이나 되는 취급을 받는다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어봤다. 정보라도 하나 더 캐낼 요량이었다. "목걸이의 제약을 상당 부분 완화해드릴 수 있어요." 그녀가 답했다. "물론 완전히 벗겨드리는 건 시기상조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실 수 있을 거예요. 거처도 옮겨드리고요." '...목걸이 완화라. 이건 꽤 구체적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냐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협상할 준비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만큼 나를 손에 넣는 일에 진심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만큼 내가 위험한 카드로 여겨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하고 최대한 애매하게 대답하자, 윤서하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웃으며 물러났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저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니까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시종도 호위도 없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렇게 중요한 제안을 하러 오면서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는 건, 이 대화 자체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즉 이 왕녀는 이미 자기 진영 안에서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상황을 정리해봤다. '기사단장은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고, 왕녀는 회유하려 하고... 이 나라 지배층이 나를 다루는 방식이 두 갈래로 갈리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나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쪽은 나를 죽이거나 무력화시키려 하고, 다른 한쪽은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단순하게 보면 후자가 훨씬 나은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그게 함정일 수도 있었다. 회유라는 건 결국 더 세련된 방식의 통제일 뿐이니까. 목걸이의 제약을 풀어주겠다는 말도, 뒤집어보면 내가 더 유용하게 부려먹히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겠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 나를 도구로 쓰겠다는 건 똑같은데, 그나마 덜 아픈 도구가 되는 쪽을 고르라는 거네.'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우연히 회의실 앞을 지나게 됐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 언성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벽에 몸을 붙인 채 귀를 기울여봤다.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틈 사이로 내 이름 비슷한 단어가 들린 순간, 발이 저절로 멈춰버렸다.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웃긴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얘기가 나오면 어떻게든 듣고 싶어지니까. "S플러스 등급이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백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놈은 마력조차 없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정규 기사를 압도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문틈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의 규칙이 무너진 데서 오는 당혹감 같은 게 섞여 있었다. '마력 없는 인간이 강한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인가.' 싶었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기도 했다. 평생 마력을 기준으로 강함을 재던 사람에게, 마력 없는 존재가 그 기준을 통째로 부숴버렸으니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말이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대응해야지요." 하고 다른 목소리가 차분하게 대꾸했는데, 이는 왕실 마법원 소속으로 보이는 노인의 음성이었다. "저자의 힘은 이제껏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방식의 전투 특성입니다. 마력이 아니라, 신체 그 자체를 매개로 한 것이지요." '신체 그 자체를 매개로 한 힘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 하고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노인, 관찰력이 꽤 날카로운 모양이었다. 내가 가진 힘의 정체를 정확히는 몰라도, 최소한 방향성만큼은 제대로 짚어낸 셈이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위험한 것 아닙니까!" 하고 백강호가 언성을 높였다. "마력이 없으니 마법으로 제어할 수도 없고, 통제 불가능한 힘을 가진 자를 이대로 놔두는 건 화약고를 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형해야 합니다!" '...처형이라니, 이 양반 진짜 성격 급하네.' 하는 생각과 함께 심장이 살짝 빨라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력으로 제어할 수 없으니 죽이자는 논리라면, 세상에 죽여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다행히 그 말에 반박하는 목소리가 곧이어 들려왔다. "강호, 흥분하지 마세요." 하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그녀도 어느새 회의실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까 나와 대기실에서 대화를 나눈 뒤 곧장 이곳으로 온 게 분명했다. "저런 인재를 처형한다는 건 국가적 손실이에요. 저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들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요." 목소리에서 조금 전 나에게 보여줬던 여유로운 미소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 여자는 어디서나 저 톤을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상대가 부하든, 정체불명의 위험인물이든 상관없이. "전하께서는 항상 유들유들한 방식만 고집하시는군요" 하고 백강호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저런 통제 불가능한 힘은 힘으로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걸이 하나로는 부족해요.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무력화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몰라도, 좋은 뜻은 절대 아닐 게 분명했다. 팔다리를 자르겠다는 건지, 아니면 더 끔찍한 뭔가를 준비해뒀다는 건지. 상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순간, 회의실 안의 온도가 갑자기 싸늘해지는 게 문틈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윤서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호, 그 사람을 건드리려면 먼저 제 허락을 받으세요. 저는 저 사람을 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니까요." 그 말투에는 뭔가 확고한 의지 같은 게 담겨 있었는데, 그게 나에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마치 물건을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듣기였다. 저 사람은 제 사람.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하는 듯한 말투에 순간 불쾌감이 치솟았지만, 동시에 저 말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나를 처형대로부터 지켜주는 방패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유혹으로 다루려는 쪽이 나은 건가, 아니면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쪽이 차라리 예측 가능한 건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 회의실 안쪽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백강호가 뭔가 더 말하려다 삼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고, 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이 나라의 권력 구도를 어렴풋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녀의 말이 기사단장의 뜻을 억누를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처형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그 계산도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순찰을 돌던 병사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회의실 안쪽에서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는데, 머릿속으로는 온갖 변명이 빠르게 지나갔다. 산책하다 길을 잃었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잠이 안 와서 돌아다녔다고 할까. 어느 쪽이든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짜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복전님, 거기서 뭐 하고 계셨나요?" 윤서하였다. 문가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회의실 안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냐고 묻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들켰나.'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조금 전까지 문틈으로 엿들었던 모든 대화의 무게가 갑자기 온몸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처형과 무력화, 그리고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사람을 그녀가 순순히 놔줄 리는 없었다.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그 짧은 순간, 나는 문득 이 밤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