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왕실 연무장은 궁전 뒤편에 자리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었다. 하늘이 뻥 뚫린 노천 구조에, 관중석은 계단식으로 층층이 올라가는 형태였는데, 대충 눈으로 셈해봐도 수백 명은 들어갈 규모였다. 그 관중석에는 귀족처럼 보이는 자들이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며 앉아 있었고, 중앙 모래바닥 주위로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방진을 이루듯 줄지어 서 있었다. 모래는 잘 다듬어져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는데,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나는 '아, 이거 완전 검투사 데뷔전 분위기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나 볼 법한 구도를, 이세계 판타지 왕궁에서 재현해놓은 셈이었으니, 이거야말로 클리셰의 정석이라 할 만했다.
"저 자가 소문의 신참 용사인가?" 하는 수군거림이 관중석에서 들려왔고, 몇몇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유독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사내를 발견했다. 어제 왕궁에서 나를 위협했던 기사단장 백강호였는데, 오늘은 아예 갑옷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나온 걸 보니 단단히 벼르고 온 모양이었다.
"마력도 없는 놈이 무슨 용사냐" 하고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는데, 그 말투에서 이미 나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게 뻔히 드러났다. 목소리 톤부터가 딱 '넌 어차피 질 거야'라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오늘 신참 기사와 모의전을 붙여서, 이놈의 실력을 확인해볼 것이다. 다치더라도 책임은 묻지 않는다."
'책임을 안 묻는다니, 참 친절하기도 하시지. 사람 몸에다가 실험할 땐 원래 그런 문구부터 넣는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겉으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모래바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발밑에서 모래가 부드럽게 짓눌리는 감각이 낯설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쪽 세계에 온 이후로 진짜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몸 안에 뭔가 이질적인 힘이 흐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실전에서 어떻게 발휘될지는 나도 확신이 없었다.
맞은편에서 걸어 나온 신참 기사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격이었는데, 검을 든 자세가 그럭저럭 훈련은 받은 티가 났다. 어깨는 벌어져 있었고, 무게 중심을 낮춘 채 검을 살짝 눕혀 잡는 폼이 딱 정석적인 검술 교본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저 자세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저 자세를 상대할 때 내가 검을 쓸 생각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다.
"목검으로 진행한다. 부상은 각오하도록." 하고 심판 역할의 노기사가 선언했고, 나는 그제야 목검 하나를 건네받았다. 무게감을 느껴보니 딱 야구방망이 정도의 감촉이었는데, 손잡이 부분이 미끈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쥐는 느낌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애초에 검을 휘두를 생각이 없었으니까. 검술이라곤 배운 적도 없는 내가, 정식 훈련을 받은 기사와 검으로 맞서봐야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대신 내가 믿는 건 이 몸에 새겨진 격투 신경, 그리고 전생에 어쩌다 굴러들어온 프로레슬링 관련 지식이었다.
"시작!" 하는 외침과 동시에 신참 기사가 검을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정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궤적이었는데, 교본대로만 움직이는 듬직한 동작이라 오히려 예측하기가 쉬웠다. 나는 그걸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 목검을 바닥에 버리고 대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목검이 모래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관중석에서는 그 순간 '검을 버렸다'는 사실만으로 잠깐 헛웃음 비슷한 반응이 나온 것 같기도 했다.
"...뭐, 뭐야!"
상대가 당황하는 순간, 나는 몸을 낮춰 그의 옆구리에 어깨를 밀어 넣고는 그대로 등 뒤로 넘겼다. 프로레슬링 기술로 치면 벨리 투 백 수플렉스에 가까운 동작이었는데, 격투 신경이 강화된 몸으로 시전하니 위력이 확실히 남달랐다. 상대의 체중이 온전히 내 어깨와 등을 통해 넘어가는 느낌, 마치 모래주머니를 짊어졌다가 그대로 던져버리는 듯한 감각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퍼억!!
상대가 등부터 모래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고, 순간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그 정적이 어찌나 완벽했는지, 방금 전까지 수군거리던 소리들이 마치 누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뚝 끊겼다. '침묵은 긍정의 표시겠지, 아마.'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봤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미동도 없었고, 입에서 작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만이 그가 그래도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저, 저게 대체 무슨 기술이지?" 하는 웅성거림이 관중석에서 다시 터져 나왔다. 몇몇 귀족들은 자리에서 반쯍 일어나기까지 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반응이 마치 이런 기술은 처음 본다는 순수한 놀라움에 가까워서, 나는 그 시선들을 받으면서도 묘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백강호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는데, 그 표정을 보니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 반응이라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검을 안 쓰고 이겼다고?" 하고 백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목에 핏대가 서는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저건 정식 대련이 아니다! 무효다!"
"규칙대로 목검 대련을 했고, 목검을 쥔 채 상대를 제압했는데, 뭐가 무효라는 겁니까?" 하고 내가 되묻자, 백강호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사실 목검을 쥔 채 제압했다는 건 조금 억지스러운 논리였지만, 목검을 버린 것 자체를 금지하는 규칙은 애초에 없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 이 양반 성질머리가 진짜 딱 예상한 대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에도 없는 잔재주를 부려서 이겼다고 정식 승리로 인정할 순 없다!" 하고 백강호가 다시 소리를 높였는데, 그 말투가 아예 어린애가 게임에서 지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나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관중석 뒤편에서 젊고 정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호, 규칙 위반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 방식도 나름 흥미롭고요."
돌아보니 화려한 예복을 입은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절제된 품위가 배어 있어서, 그 자태에서 이미 상당한 신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백강호가 즉시 고개를 숙이며 "왕녀 전하" 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저 여인이 바로 이 나라의 제1왕녀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이름이 윤서하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순간엔 그저 '눈빛이 유난히 계산적인 사람이네' 하는 인상만 받았을 뿐이었다. 눈매가 가늘고 서늘한데,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걸려 있는 그런 얼굴이었는데, 그 조합이 묘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종류의 인상이었다.
"복전이라 불린다고 들었는데, 흥미로운 기술이었어요." 하고 그녀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어쩐지 순수한 호감보다는 뭔가를 재는 듯한 느낌이 강해서 나는 저절로 경계심이 올라갔다. '저건 딱 상품을 감정하는 눈빛인데.' 나는 그렇게 속으로 정리하며 표정을 최대한 무덤덤하게 유지했다.
"저런 잔재주로 정규 기사를 대할 순 없습니다" 하고 백강호가 여전히 씩씩거리며 끼어들었다. "공인 대련을 통해 정식으로 등급을 매겨야 합니다. 그래야 저놈의 실력이 제대로 검증될 것입니다."
윤서하는 그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를 살짝 펴서 입가를 가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한 몸짓을 취했는데, 그 동작 하나조차도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형식적으로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사흘 뒤, 왕실 공인 대련장에서 정식으로 등급 판정을 받도록 하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관중석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벌써부터 내기를 거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는데, 아마 사흘 뒤의 대련이 이 왕궁 안에서 제법 큰 구경거리가 될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뭔가 일이 자꾸 커지는 방향으로 가는데.' 조용히 지내다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빠져나갈 계획이었건만, 상황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더 큰 무대로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백강호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윤서하는 그런 그를 흥미롭게 지켜보며 부채를 접었다. 사흘 뒤, 대체 어떤 자들이 나를 상대로 나올지, 그리고 그 '정식 등급 판정'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건지,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