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슬을 부수는 주먹

2화

발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췄고, 문틈으로 갑옷 어깨 갑판이 언뜻 비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며 방어 자세를 취했는데, 영태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손아귀 힘이 생각보다 세서, '이 자식 보급병이라더니 힘은 좋네' 하는 엉뚱한 생각이 먼저 스쳤다. "괜찮아요, 저건 그냥 순찰 기사예요." 하고 영태가 속삭였다. 문 너머 발소리가 잠시 서성이다가 다시 멀어졌고,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릴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가슴께를 손으로 눌렀다. '...휴, 이거 매 시간마다 심장이 떨어지겠는데. 이러다 스트레스로 죽으면 그게 더 억울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 세 사람의 숨소리만 나란히 얹혀 있었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홍담이었다. "저는 여섯 달 전에 왔어요. 영태는... 학교 같은 반이었는데, 저보다 넉 달 먼저 끌려왔어요." 하고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안쓰럽게 들렸는데, 여섯 달이나 이곳에서 버텨온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해서였다. "먼저요?" 하고 내가 되묻자, 영태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야자 끝나고 혼자 하교하다가... 눈 떠보니 여기였어요. 편의점 앞 골목이었는데, 갑자기 시야가 하얘지더니 정신 차려보니까 이상한 신전 바닥이더라고요. 홍담이는 그로부터 넉 달 뒤에 끌려왔는데, 마법 소질이 있다고 해서 지원 기사로 배치됐고, 저는 그냥 전선 보급병으로 끌려다녔어요." "보급병이면 뭐 하는데?" 하고 내가 묻자, 영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짐 나르고, 화살 줍고, 시체 치우고... 뭐 그런 거요. 처음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열여덟 살짜리한테 시체를 치우라니, 그것도 하루에 수십 구씩."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 나라는 필요에 따라 다른 세계 사람들을 소환해서 전쟁 도구로 써먹는다는 얘기였는데, 그 방식이 하도 뻔뻔해서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법에 재능이 있으면 마법사로, 없으면 노동력으로, 그것도 아니면 소모품으로 굴리는 구조. '평화롭게 학교 다니던 애들을 전쟁터에 끌고 오다니, 이 나라 인권 감수성이 진짜 밑바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나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목걸이는...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홍담이 목걸이를 매만지며 설명했다. 손끝으로 목걸이 표면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어딘가 익숙해 보였는데, 아마 그동안 셀 수 없이 반복했을 동작이라는 게 느껴졌다. "왕실이나 상급자의 직접 명령을 어기면 즉시 발동해서 처형돼요. 그리고 국경을 벗어나려고 하면... 그것도 마찬가지고요. 한 번은 다른 소환자가 몰래 도망치려다가 국경 근처에서... 목걸이가 그냥 터졌대요. 저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소문이 그렇게 돌았어요." "터졌다는 게, 그 사람이?" 하고 내가 조심스레 되묻자, 홍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이 어떤 설명보다 확실했다. "그럼 그냥 순종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겠네." 하고 내가 중얼거리자, 영태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저씨, 되게 침착하시네요. 처음 온 사람들은 보통 며칠은 패닉 상태로 지내던데. 저도 처음엔 매일 밤 울면서 잤어요."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패닉은 무슨, 이미 인생에서 몇 번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 이 정도로 놀라면 그동안 굴러먹은 세월이 아깝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신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럼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뭘 알아야 돼? 규칙 같은 거 있어?" 하고 묻자, 영태와 홍담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번갈아가며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급 기사에게는 눈을 마주치지 말 것, 식사 시간은 정확히 지킬 것,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 것 등등. 사소해 보이지만 어기면 즉결 처분감이라는 규칙들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듣다 보니 이곳이 얼마나 살얼음판인지 실감이 났다. 그날 밤, 다들 잠든 틈을 타서 나는 조용히 시스템 창을 다시 열어봤다. 소환 직후부터 시야 한켠에 흐릿하게 떠 있던 아이콘을 눌러보니, 처음 보는 정보창이 펼쳐졌다. [숙주 정보] [이름: 한지훈] [마력: 0] [격투 신경: 각성 대기 중] '마력이 0이라고?' 하는 생각에 살짝 당황했는데, 곧이어 격투 신경이라는 낯선 항목에 눈이 갔다. 손가락으로 그 항목을 짚어보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숙주는 마력 친화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격투 신경계 특성'이 감지되었습니다.] [전투 경험치가 축적될 때마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됩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방 안에서 가볍게 몸을 풀어봤다. 팔을 뻗고 발차기를 시도해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무릎이 삐걱거릴 시간대인데 관절이 유난히 가볍게 돌아갔고, 주먹을 뻗을 때 손끝까지 전해지는 힘의 감각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있다가 갑자기 벗은 듯한 감각이었다.' 발차기 한 번에 벽 틈으로 스며든 흙먼지가 훅 날릴 정도였으니, 이건 그냥 몸이 좋아진 수준이 아니라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번엔 좀 더 세게 주먹을 뻗어봤는데, 그 순간 손등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관절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게 재조립되는 소리 같았다. '마력 대신 이런 식으로 밸런스를 맞춘 건가.' 하고 나는 속으로 추측했다. 요컨대 이 세계의 능력치 체계에서 나는 마법사가 될 자격이 없는 대신, 몸뚱이 하나로 승부를 봐야 하는 부류로 분류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싸우고, 이기고, 또 싸우는 것. 그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복잡한 마법 이론을 익힐 필요도 없고, 그냥 몸으로 부딪히면 되는 거였으니까. "...뭐 하세요?" 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잠에서 깬 영태가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몸 좀 풀어봤어." 하고 얼버무렸지만, 영태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그 발차기 소리, 되게 컸는데... 벽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기분 탓이야." 하고 나는 대충 둘러대며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속으로는 이 특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계산이 바쁘게 돌아갔다. '마력이 없다고 무시당할 판이었는데, 오히려 이쪽이 더 위험한 무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앞으로 이 능력을 어떻게 숨기고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너무 빨리 드러내면 경계 대상이 될 테고, 너무 숨기면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받을 테니, 그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한참을 뒤척이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주먹을 뻗고 있었던 것 같다. 몸이 가벼워진 감각이 꿈에서까지 남아 있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이 변화가 생각보다 훨씬 근본적인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요란한 문소리에 눈을 뜨자 갑옷을 입은 병사 셋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쾅쾅쾅, 문짝이 부서질 듯한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는데, 옆에서 자던 영태와 홍담도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반응 속도만 봐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나를 향해 창을 겨누며 말했다. 창끝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데, 그 서늘한 광택이 지금 이 상황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복전, 왕실 연무장으로 이동한다. 마력 각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모의전이 있을 것이다." 영태와 홍담의 얼굴이 동시에 굳는 게 보였다. "모의전이라니... 그거, 보통 신참 용사들 다치라고 하는 시험이에요." 하고 영태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번에 온 사람도 그거 하다가 팔이 부러졌어요. 마력 없으면 그냥... 두들겨 맞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제 확인했던 시스템 창의 문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력 친화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의전이라는 게, 나한테는 이미 실패가 예정된 시험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병사들은 이미 내 팔을 붙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저항할 틈도,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거친 손길이었는데, 그 손아귀 힘에 끌려 일어나면서도 나는 묘하게 침착한 기분이었다. 어젯밤 확인한 그 낯선 힘이,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그게 오히려 궁금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