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 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가벼운 소리였는데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개수대에 그릇을 놓다 말고 손을 닦았다. 앞치마에 물기를 문지르며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발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문을 열자 채린이 서 있었다.
한 손엔 검은 봉지, 다른 손엔 소주 두 병. 봉지 안에서 감자칩 포장지가 부스럭거렸다.
"같이 마셔요." 그가 병을 흔들며 웃었다. 조명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살짝 흔들렸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문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번에 반찬을 받았다. 그 뒤로 완전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 이 동네에서 술 한잔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어떤 건지, 나도 모르지 않았다.
문을 열어줬다.
우리는 마루에 앉았다. 낡은 좌탁 위에 소주와 감자칩이 놓였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채린이 봉지를 뜯는 소리, 비닐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서연 씨, 원래 이 동네 살았어요?"
"네. 태어날 때부터요."
"신기하다." 채린이 소주 뚜껑을 돌렸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서울이었는데."
채린이 잔에 술을 따랐다. 손목에서 얇은 팔찌가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금빛인지 은빛인지 알 수 없는 그 팔찌가, 채린이 움직일 때마다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근데 왜 여기로 왔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린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스쳐 지나갔다. 낯설고 딱딱한 얼굴이었다.
"도망쳤어요."
"…네?"
"서울에서. 우리 집에서." 그가 잔을 비웠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부모님이랑 연 끊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자칩을 집으려던 손이 멈춰 있었다.
"우리 아빠가 좀 그런 사람이에요." 채린이 다시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회사 하나 갖고 있는데, 딸이 회사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왜요?"
채린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슬퍼 보였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내가 남자를 좀 많이 만났거든요. 술자리에서, 클럽에서." 그가 감자칩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씹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게 소문이 나서 아빠 회사 주주들 사이에서 말이 돌았대요. '딸 관리도 못 하는 사장'이라고."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한 번, 진짜 크게 사고를 쳤어요." 채린의 손끝이 잔 테두리를 따라 원을 그렸다. "상대방이 유부남이었는데, 그 사람 아내가 우리 아빠 회사로 찾아온 거예요."
"…"
"로비에서 소리를 질렀대요. 직원들 다 보는 데서." 채린이 잠깐 숨을 골랐다. "아빠가 그날 나한테 그랬어요. '너 같은 딸은 필요 없다.' 엄마는 옆에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아졌다. 술잔을 만지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어요.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떼졌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엄마 얼굴을 봤는데, 눈도 안 마주치더라고요."
"그날로 집 나왔어요. 통장에 있는 돈 챙겨서. 여기까지 왔고요."
나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술이 반쯤 남은 잔 안에서 작은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근데 왜 그렇게 많이 만났어요? 남자를."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후회할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아, 이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채린이 나를 잠깐 쳐다봤다.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여태 봐온 채린의 얼굴 중 가장 무방비한 것이었다.
"몰라요."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났다. "그냥, 누가 나를 만질 때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앉아 있었다.
"이상하죠?" 채린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억지스러운 웃음이었다. 입가는 웃는데 눈가는 그대로였다.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해가 안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나니 처음 만난 날의 그 무례한 제안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건 나를 진짜로 원해서가 아니라, 채린이 그렇게밖에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온기가 아니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앉아 술잔을 만지고 있었다.
"서연 씨는 좋겠다." 채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족이 있었잖아요. 할머니랑."
"이제 안 계세요."
"그래도 있었잖아요." 채린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랑받은 기억이."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거칠고 마른 손. 그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건 확실히, 채린에게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셨다. 소주병이 반쯤 비었다. 감자칩 봉지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채린이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운 유리창에 방 안의 불빛이 흐릿하게 비쳤다.
"여기 조용해서 좋아요." 그가 중얼거렸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이런 조용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심심하지 않아요?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게 좋은 거예요." 채린이 옅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무너질 게 없잖아요."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잔을 비웠다.
그날 밤, 채린은 자정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봉지에 남은 감자칩 부스러기를 정리하고, 빈 소주병을 문 옆에 가지런히 세워두는 손길이 이상하게 정성스러웠다.
문 앞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먼저 말했다.
채린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이 살짝 커졌다.
"서연 씨가 먼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이네요."
그가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문틈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빈 소주병 두 개가 문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감자칩 봉지는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한 채 좌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치워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채린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누가 나를 만질 때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내가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좌탁 앞에 다시 앉았다.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채린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채린의 목소리가 방 안 어딘가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유리를 흔들었다. 덜컹, 하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채린은 왜 하필 이 동네였을까. 왜 하필, 이 건물이었을까.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번 자리 잡은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빈 소주병 위로 조명이 흐릿하게 비쳤다. 병 안에 남은 몇 방울의 술이, 흔들릴 때마다 작은 빛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