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자멸종 귀공자

3화

저녁 무렵, 저택의 대문 앞에 검은 승용마차가 멈춰 섰을 때, 서준은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이 저택에서는 방문객이 오는 일이 흔치 않았고, 특히 이렇게 격식을 차린 마차가 저녁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는 것을 서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백작가의 시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마중을 나가는 모습에서 이미 이 방문객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마차 문이 열리며 내려선 여인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숨이 잠시 멈추는 걸 느꼈다는 것을. 검은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여인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목구비의 균형이 어딘가 낯익다는 인상을 서준에게 주었다. 아니, 낯익은 게 아니라, 몸이 먼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는 것을. 걸음걸이 하나,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습관 하나까지도 마치 오래전부터 봐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이서준의 방으로 곧장 안내되는 사이, 서준의 머릿속에서는 조각난 기억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어린 시절, 아니 정확히는 이 몸으로 살아온 아주 이른 시기의 기억들이었다. 열병에 시달리며 별채에서 홀로 울던 밤,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고 몰래 들어와 손을 잡아 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 손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상하게 안정적인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는 자장가도 아니었고 위로의 말도 아니었지만, 그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열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 같았던 기억이었다. 그 손의 온도, 그리고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지금 문 앞에 선 여인의 것과 겹쳐졌다. 문이 열리고 여인이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그녀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존댓말은 정중했으나 그 안에 담긴 어조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는 것을.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지아입니다." 한지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준의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는 것을.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일까, 서준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앉았고, 그 모습을 본 한지아가 조금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순수한 걱정과, 동시에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서준은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그냥……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한지아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창밖의 안개가 짙어지는 시간이었고,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 젖히며 말했다. "저는 도련님이 이 저택에 오신 첫날부터 곁에 있었습니다. 백작가의 비서로서, 그리고 도련님의 후견인으로서요. 다만 이 년 전, 제가 다른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자리를 비웠던 것뿐입니다." 이 년. 서준은 그 숫자를 되새겼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는 그 손의 온기는 최소한 이 년 전, 지금보다 어린 자신이 느꼈던 감각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기억이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는 것을. 몸의 기억과 정신의 기억이 서로 다른 시간축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낯설었지만, 그것이 지금 자신을 이루는 방식이라는 것을 서준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년 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서준이 물었다. "북부 지방의 지부에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한지아가 짧게 대답했다. "규수반 관련 행정 업무를 맡았습니다." 규수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서준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오늘 낮에 조혜림 특임관을 만났습니다." 서준이 화제를 돌렸다. "규수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한지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동요였으나, 서준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 마침내 도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 그녀가 다시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저도 그 서류를 봤습니다. 도련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겠습니다." "어떤 결정이든이라고요." 서준이 되물었다. 그 말투에 냉소가 섞였다. "당신도 저를 그저 국가 자산으로 보시는 겁니까?" 한지아는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서류 가방을 열어 서준 쪽으로 문서를 내밀었는데, 그 문서에는 그녀의 이름이 특별 후견인이라는 직함과 함께 규수반 명단 옆 별도 항목에 적혀 있었다는 것을. 종이 위에 인쇄된 그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서준은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 걸 느꼈다. "제 신분은 낮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비서 신분으로는 도련님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법 아래에서는, 후견인 자격으로 도련님의 첫 상대가 될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서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첫 상대. 그 단어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무겁게 만들었고, 한지아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끝이 서류를 쥔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서준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창밖 가스등의 불빛이 흔들리며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그저 오래 참아온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서준이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한지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지금 설명드리기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그 대답이 오히려 서준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감추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업무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으로 알아차렸다는 것을. 별채에서 울던 밤 잡아주던 그 손이, 지금 서류를 쥐고 있는 이 손과 같은 것이라면, 그 이 년의 공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준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다만 한지아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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