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자멸종 귀공자

2화

다음 날 아침, 흑하 백작가의 응접실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이 감돌았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안개가 정원의 마른 나무들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안개는 매년 이맘때면 저택 전체를 감싸 도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오늘만큼은 그저 눅눅하고 불길한 회색빛으로만 보였다. 서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하게 그늘져 있었고, 손끝은 찻잔을 쥐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으며,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어젯밤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인구부흥원 소속 특임관이라는 명패를 목에 건 여인이 서류 뭉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지나치게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혜림이라는 이름이었다. 나이는 서준보다 열 살은 위로 보였는데, 정갈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흠 하나 없는 정복이 그녀가 이 자리에 얼마나 익숙한 사람인지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놀라셨을 겁니다, 도련님." 조혜림이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말했다. 존댓말이 과하게 정중했는데, 그 정중함이 오히려 서준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예의라는 것이 위협을 감싸는 얇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건 백작가만의 일이 아니라 국가 존속의 문제라는 걸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국가 존속이요." 서준이 되물었다. 목소리에 냉소가 섞여 나온 건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으나, 참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그에게 이런 종류의 거창한 명분은 늘 의심의 대상이었고, 명분이 클수록 그 뒤에 감춰진 계산은 더 치밀하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배워 알고 있었다. 조혜림은 그 냉소를 못 들은 척, 서류 한 장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위에는 인구부흥원의 붉은 인장과 함께 남성 인구 현황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고, 숫자는 서준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전체 인구의 0.1퍼센트. 그는 그 숫자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는데, 마치 그렇게 하면 숫자가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이십여 년 전 대역병이 이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조혜림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상하게도 병은 남성에게만 치명적이었고, 살아남은 성인 남성은 극히 드물었으며, 그 이후로 태어나는 남아의 비율도 극단적으로 낮아졌습니다. 도련님 같은 분은…… 그야말로 국가의 미래 그 자체입니다." 미래. 그 단어가 서준의 속을 뒤틀었다. 그는 조혜림의 말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처한 상황의 전체 그림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관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산을 위한 관리였다는 것을. 보호받는 존재와 관리되는 존재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는 걸, 그는 지금 이 응접실에서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저더러 뭘 하라는 겁니까." 서준이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아래 깔린 긴장은 감춰지지 않았다. 조혜림은 잠시 뜸을 들이다, 서류 뭉치의 맨 아래 장을 꺼내 그의 앞에 펼쳤다. 그 위에는 서른 명 가까운 여인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서준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고, 하나같이 귀족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이 옆에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얼굴들은 하나같이 단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 미소가 자발적인 것인지 강요된 것인지 서준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규수반이라 불리는 명단입니다." 조혜림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나라의 법에 따라, 성년이 되신 남성분들은 등록된 규수반과의 결합을 통해 후사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오늘부로 정식으로 그 대상이 되셨습니다." 의무. 후사. 결합. 그 세 단어가 차례로 서준의 가슴을 두드렸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서른 명의 여인, 그 각자의 얼굴 위에 적힌 이름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전생에서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존재들이 지금 이 세계에서는 오히려 자신에게 배정된 물건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름 하나하나를 눈으로 짚어가던 그는, 문득 이 명단 위의 누군가도 지금 이 순간 어느 응접실에서 비슷한 서류를 받아 들고 비슷한 절망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생각은 그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 명단에 있는 분들의 의사는 물어보셨습니까." 서준이 물었다. "의사요?" 조혜림이 처음으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마치 그런 질문 자체가 낯설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규수반에 등록된 분들도 절차에 동의하셨습니다. 다만 그 동의라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크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선택지가 없다. 서준은 그 말을 속으로 다시 곱씹었다. 결국 이 명단 위의 여인들도, 그리고 자신도, 같은 그물 안에 갇힌 존재들이라는 뜻이었다. "거절할 수는 없는 겁니까." 서준이 낮게 물었다. "거절이라뇨." 조혜림이 처음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표정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도련님, 이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나라의 생존입니다. 감히 거절을 말씀하시는 분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서준은 그 말에서 협박보다 더 무서운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이 사회 전체가 이미 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확신이었다는 것을. 협박은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연함은 저항할 대상조차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명단 위의 얼굴들을 다시 훑어보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들을 도구로 만들지 않는 것. 적어도 그것 하나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거창한 결심이랄 것도 없었으나, 지금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 결정을 받아들이시는 데 시간이 필요하실 겁니다." 조혜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류를 정리했다. 정리하는 손길이 지나치게 신속하고 정확해서, 마치 이 대화 자체가 그녀에게는 수십 번 반복해 온 일상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래서 백작가에서는 도련님을 전담할 후견인을 다시 배정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중으로 도착하실 겁니다." "후견인이요." 서준이 되물었다. 이미 흑하 백작가에는 후견인이 있었다. 새삼스레 다시 배정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서준은 순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네." 조혜림이 문가에서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여유가 담겨 있었는데, 마치 서준이 곧 알게 될 무언가를 미리 즐기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아마 낯설지 않은 분일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조혜림이 응접실을 나서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준은 다시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낯설지 않은 분이라니. 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이유 없이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창밖의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여전히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안개 너머로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한 대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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