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부터 안 웃기로 했다

2화

은서는 재빨리 눈가를 손끝으로 훔치고 캔을 뒤로 숨겼다. 손등에 남은 물기가 차가웠다. 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 도현아."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들켰나.' "화장실 간다더니 여기서 뭐 해?" 도현이 가볍게 웃으며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목 말라서." 은서는 애써 평소 목소리를 냈다. 입꼬리를 다시 끌어올렸다. 웃는 얼굴이 익숙하게 만들어졌다. 수백 번 연습한 표정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수업 종 쳤어. 빨리 가자." "응." 도현과 나란히 걸으며 은서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서준의 뒷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자리엔 서늘한 복도의 공기만 남아 있었다. 캔은 아직 손에 차갑게 남아 있었다. '왜 아직도 이걸 들고 있지.'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결국 가방 옆주머니에 슬쩍 넣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은서는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냥 조금 더 조용한 시간에 학교에 있고 싶었다. 알람을 듣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평소 같으면 이불 속에서 십 분은 더 뒹굴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버스 안에서도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 아침 공기가 유난히 서늘했다.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창가 뒷자리에 이미 서준이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옆얼굴에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은서는 자리로 가다가 멈춰 섰다. '인사를 해야 하나.' '그냥 지나가면 이상하려나.' '근데 인사하는 것도 이상한데.'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핑퐁처럼 오갔다. 어제 그 캔은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가방 옆주머니에 넣어둔 캔이 문득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은서는 그의 옆을 지나가며 작게 말했다. "저기." 서준이 이어폰을 뺐다. 느릿한 동작이었다. 마치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제, 그 음료수. 고마웠어." "별거 아니었어요." 짧은 대답. 무뚝뚝했지만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그 무심함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근데 왜 그런 거야?" 은서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뭘요?" "나 그때 울고 있었잖아. 근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그냥 음료수만 줬어?" 서준이 잠깐 은서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고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이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은서는 괜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을 살짝 내렸다. "물어보면 대답하기 싫을 것 같아서요." 은서는 순간 말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맞아, 그때 뭐라고 대답했을지 모르겠는데.' 심장 어딘가가 콱,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마음속 어딘가가 살짝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고 은서는 자리로 돌아갔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서준은 다시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봤다.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둘 다 그날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1교시가 시작될 때까지, 은서는 노트 필기를 하다가도 몇 번이나 창가 쪽으로 시선이 갔다. '왜 자꾸 신경 쓰이는 거야.' 스스로를 다그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점심시간, 매점 옆 자판기 앞. 은서는 우연히 다시 서준과 마주쳤다. 둘 다 뭔가를 뽑으려는 참이었다. 매점 앞은 늘 그렇듯 시끌벅적했다. 누군가는 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었고, 누군가는 급하게 뛰어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자판기 앞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또 여기서 보네." 은서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자주 오는 곳이라." 서준이 짧게 대답했다. 은서는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덜컹. 캔을 주우려고 몸을 굽히다가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판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웅웅 울렸다. 은서는 목이 살짝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게 뭔 느낌이야.'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서둘러 자세를 바로 세웠다. 캔을 손에 꼭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다. "저기, 어제 일은 아무한테도 말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할 거예요." "그냥 확인하려고." 목소리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믿어도 돼요." 은서는 서준의 눈을 잠깐 들여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담백했다. 겁먹은 토끼처럼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얼굴이었다. 그 담백함이 은서에게는 오히려 신뢰가 됐다. "우리 그냥, 아는 사이인 거지?" 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히 이상한 관계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거였다. 서준이 잠깐 뜸을 들였다. 그 침묵이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런 거죠." "그래, 그런 거야."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쩐지 그 확인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새로 뽑은 캔을 하나 더 쥐고, 은서는 먼저 자리를 떴다. 걸어가는 내내 등 뒤가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냥 아는 사이. 그게 맞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같은 시간, 다른 복도에서 정우진이 서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우진은 서준과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였다. 성격이 정반대라 서준 본인도 왜 붙어 다니는지 모를 정도였다. "야, 방금 걔랑 얘기했지?" 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 서준은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한은서." 그 이름이 나오자 서준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진의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냥 자판기 앞에서 마주친 거야." "어제도 그랬다면서?" 우진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먹잇감을 발견한 여우 같은 표정이었다. "소문 빨리 퍼지네." 서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민재가 봤대. 너희 둘이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서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벌써.' 괜한 오해를 사는 건 딱 질색이었다. 학교라는 곳이 소문 하나로 얼마나 시끄러워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표정이 굳어?" 우진이 짓궂게 웃으며 팔꿈치로 서준을 툭 쳤다. "표정 안 굳었어." "지금도 굳었는데."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우진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계속 뭐라고 떠들었다. "야, 진짜 뭐 없어? 어제 매점 앞에서도 봤다던데. 그것도 우연이야?" "우연이야." "우연이 두 번이면 그게 우연이냐, 인연이지." 등 뒤에서 우진이 계속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은서가 어제 눈을 훔치며 웃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울고 있던 얼굴 뒤에 억지로 끌어올린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신경 쓸 필요 없는 건데.'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발걸음은 어쩐지 무거웠다.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 끝,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은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준은 잠깐 멈춰 섰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었다. 우진이 그걸 놓칠세라 씨익 웃었다. "거봐. 신경 쓰이는 거 맞잖아." 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 된 것 같아서, 서준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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