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은채는 도윤을 학교 뒤편 벤치로 불러냈다. 늦은 오후, 햇살이 나무 그늘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은채의 손에는 작게 접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 여기, 대사.
도윤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손끝이 종이 결을 스치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쿵, 내려앉았다. 몇 문장이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나 너 좋아하는 마음, 하나도 안 변했어.]
[네가 나쁜 말 해도,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
도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
— 이걸 그냥 말하라고?
— 응. 이번 주 금요일, 동아리 축제 뒤풀이 있잖아. 사람 많은 곳에서 이 말을 던져. 서윤이가 제일 못 견디는 게 바로 그거야. 공개적인 자리에서 직진 고백.
— 왜 그게 제일 못 견디는데?
은채는 팔짱을 끼고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빛이 확신에 차 있었다.
—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거든. 걘 아무리 독설로 무장해도, 사람들 다 보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밀고 들어오면 방어할 방법이 없어. 평소엔 말 한마디로 사람 다 밀어내는데, 그게 안 되는 순간이 딱 그때야. 그때 본모습이 나와.
— 본모습이라니.
— 겁먹은 얼굴. 걘 그거 절대 안 보여주려고 해. 근데 사람 많은 곳에서, 도망갈 데도 없는 곳에서 진심 훅 들어오면... 못 버텨.
도윤은 종이를 다시 접었다. 접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미리부터 뛰기 시작했다.
— 근데 나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
— 알아. 근데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 그 경영학과 선배, 요즘 서윤이한테 진짜 적극적으로 다가온대. 어제도 같이 커피 마시는 거 봤다니까. 서윤이가 흔들리기 전에 네가 먼저 확실하게 마음 보여줘야 해.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그 남자와 웃고 있던 서윤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웃음소리, 가까워진 어깨, 그 사이로 흐르던 묘한 온기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도 놀라운 감정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윤과의 관계에 지쳐 있었는데, 매일같이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는 게 버거웠는데, 이제는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독설이, 그 차가운 눈빛이, 어느 순간부터 도윤의 하루를 채우는 전부가 되어 있었다.
— 알겠어. 할게.
은채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입꼬리가 확신에 차서 올라갔다.
— 좋아. 그리고 하나 더. 뒤풀이 시작하면 내가 자연스럽게 서윤이를 무대 근처로 데려갈 거야. 그때 네가 등장해서 대사를 던지는 거야. 타이밍은 내가 신호 줄게.
— 신호는 뭔데?
— 내가 손 흔들면 그때 나와. 너무 빨리도, 너무 늦게도 안 돼. 딱 그때야.
— 만약에 타이밍을 놓치면?
은채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 놓치면 안 돼. 그 순간이 지나가면 서윤이는 다시 방어벽을 세워. 그럼 다음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단순했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도윤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방금 헤어진 여자에게 고백 같은 말을 던진다는 것 —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 대사 외웠어?
— 외웠어. 근데... 진짜 이걸로 될까.
— 될 거야. 안 되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서윤이가 진짜 마음이 없는 거고. 근데 내가 보기엔 있어. 확실히.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윤의 어깨를 툭 쳤다.
— 금요일까지 연습해둬. 어색하게 읽으면 다 티 나.
도윤은 그날 밤부터 방 안에서 종이를 펼쳐놓고 몇 번이고 문장을 읽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낯설었다. 서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을 건네보면,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이 말을 서윤 앞에서 할 수 있을까. 그 차가운 눈빛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 도윤은 수업 중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그 문장들을 되뇌었다. 어느 순간에는 익숙해진 것 같았지만, 서윤의 실제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동아리 축제 뒤풀이 장소는 학생회관 대강당이었다. 조명이 어둑하게 깔리고,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렀다. 바닥에는 종이컵과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스피커 소리와 섞여 강당 전체를 채웠다.
도윤은 무대 뒤편 그늘에 숨어 심장을 억누르고 있었다. 손에 쥔 종이는 이미 여러 번 접고 펼치기를 반복해 귀퉁이가 닳아 있었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종이에 적힌 대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셔츠 안쪽으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할 수 있어. 딱 한 번만.'
멀리서 은채가 서윤을 데리고 무대 근처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서윤은 오늘도 어김없이 시선을 끄는 옷차림이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은채가 뭐라고 말하는지, 서윤이 살짝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 웃음이 낯설게 낯익었다.
도윤의 시선이 그 웃음에 붙박였다.
'저 웃음, 나한테는 안 보여줬는데.'
씁쓸한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은채가 슬쩍 손을 들었다.
신호였다.
도윤의 다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듯 쿵쿵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발을 내디뎠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서윤 앞으로 걸어갔다. 어깨가 부딪히고, 누군가의 음료가 손에 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서윤이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 ...강도윤?
목소리에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 뒤로 순간적으로 균열이 스쳤다. 도윤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주변 몇몇이 두 사람의 재회를 눈치채고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군거림이 스피커 소리 사이로 낮게 번졌다. 도윤의 목구멍이 바짝 말라갔다.
'지금이다.'
은채가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어서,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윤은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종이에 적힌 첫 문장을 입 밖으로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