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강대학교 후문 카페, 창가 자리.
늦은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비스듬히 들어왔다. 원목 테이블 위,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강도윤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이서윤은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그 옆얼굴은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 오늘도 늦었네.
서윤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도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강의가 늦게 끝나서…….
— 그런 핑계 몇 번째인지 알아? 지난주 화요일에도 그랬고, 그 전주 토요일에도 그랬어. 매번 강의, 매번 조모임. 나랑 만나는 시간이 그렇게 하찮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도윤은 그냥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시선이 도윤의 목덜미에서 셔츠 깃까지, 그리고 소매 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 옷차림도 그게 뭐야.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이렇게 신경을 안 써?
도윤은 오늘 아침, 옷장을 열고 한참을 뒤적였다. 그나마 제일 깔끔한 셔츠를 골라 입었고, 나름대로 다림질까지 했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서윤 앞에서는 늘 이랬다. 뭘 해도 부족했고, 뭘 해도 틀렸다. 변명은 곧 또 다른 흠이 되어 돌아왔다.
둘의 연애는 석 달째였다. 도윤에게는 생애 첫 연애였다. 고등학교 3년, 대학교 1학년까지 도윤은 연애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미팅에도 나가지 않았고, 소개도 마다했다. 그런 그에게 캠퍼스에서 유명한 미녀 이서윤이 먼저 다가와 관계가 시작됐을 때, 도윤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윤이 웃으며 번호를 물었던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 기분이 언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첫 데이트에서 서윤이 도윤의 신발을 보고 미묘하게 웃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두 번째 만남에서 도윤이 예약해둔 식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을 때부터였을까. 다만 확실한 건, 요즘 서윤과 마주 앉는 시간이 점점 두려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손끝이 차가워졌고, 카페 문을 열기 전에는 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야 했다.
— 강도윤.
서윤이 이름을 불렀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 너 나랑 왜 만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도윤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 좋아하니까.
— 좋아한다는 게 뭔데. 매번 늦고, 연락도 뜸하고, 성의도 없고. 그게 좋아하는 사람 태도야?
서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도윤은 그 시선이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참았다.
— 연락도 매일 했잖아. 어제도 자기 전에…….
— 자기 전에 잘 자라는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연락이야? 하루 종일 내 생각을 한다면 그것보단 더 자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도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매일 반복되는 이 패턴. 서윤은 늘 그를 몰아세웠고, 도윤은 늘 방어하다가 지쳐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지면 서윤은 그마저도 성의 없다며 탓했다.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오늘은... 참지 말자.'
도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커피잔을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 서윤아. 나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
서윤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 뭔데.
— 매일 이렇게 지내는 거, 나 힘들어. 네가 나한테 하는 말들... 좋아한다면서 왜 그렇게 상처 주는 말만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게 매번 부족하다는 말만 들으니까... 이제는 만나기 전부터 무섭기까지 해.
말을 뱉고 나니 손끝이 떨렸다. 3개월 만에 처음으로 꺼낸 속마음이었다. 그동안 삼켜왔던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한꺼번에 올라온 것 같았다.
서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내 차갑게 되받아쳤다.
— 그럼 헤어지자는 거야?
그 말이 너무 빠르고 단호해서, 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헤어지자는 말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힘들다는 걸, 조금만 다르게 대해달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단어를 먼저 꺼내버렸다.
— 그, 그게 아니라…….
— 아니면 뭔데. 힘들다, 무섭다, 그런 말을 왜 나한테 해. 나랑 계속 만나고 싶으면 그런 말 안 하는 거 아니야?
서윤은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끄으윽 소리를 냈다.
— 그래, 헤어져. 나도 지쳤으니까.
도윤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앉아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는데도, 서윤이 그렇게 즉답으로 받아치자 오히려 자신이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했다. 힘들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는데, 관계를 끝낸 건 서윤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매달리다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 ...그래. 그러자.
도윤의 목소리는 떨렸다. 서윤은 그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아무 표정 없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귓속에서 한참 동안 맴돌았다.
도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유리잔 표면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테이블 위로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놓았다. 창밖으로 서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발걸음은 흔들림 없이 곧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도윤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3개월 동안 참아온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좋아해서 시작한 연애였는데, 남은 건 자존감의 바닥과 알 수 없는 자책뿐이었다. 처음 사귀자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벅찬 기분과, 지금 이 텅 빈 자리에서 느끼는 허무함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도윤은 그 낙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페 안 다른 테이블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평범한 소음 속에서 도윤만이 혼자 다른 시간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도윤은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를 정리했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카페를 나선 도윤은 정처 없이 캠퍼스 안을 걸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은행나무 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낯설게 들렸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구름 한 조각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느린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부르르르.
화면에는 '박은채'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도윤과 서윤의 공통 친구, 은채였다. 세 사람이 같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고, 서윤과 도윤이 사귀게 된 뒤로도 은채는 종종 셋이 함께 밥을 먹자며 자리를 만들던 사람이었다.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방금 헤어진 사람과 관련된 사람의 전화라는 게 묘하게 부담스러웠다.
— 여보세요.
— 도윤아! 너 지금 어디야? 급한 일이야, 당장 만나야 해.
은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숨소리마저 거칠게 들렸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어조였다. 은채는 늘 느긋하고 장난스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무슨 일인데?
도윤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스며들었다.
— 만나서 얘기해. 지금 후문 광장으로 나와. 서윤이 관련된 일이야.
도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방금 헤어진 그 이름이 다시 나올 줄은 몰랐다. 헤어진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서윤과 관련된 일이라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스쳤다.
— 서윤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
—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일단 만나서 얘기해. 여기서는 말 못 해. 빨리 와줘.
전화 너머로 은채가 주위를 살피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를 낮추는 소리, 짧은 침묵.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했다.
— ...알겠어.
전화를 끊은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는 이별의 충격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심장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종류의 긴장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기 직전, 그 예감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윤은 벤치에서 일어나 후문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한 번 더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서늘한 감촉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