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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음 날 아침, 학생회관 앞은 아직 인적이 드물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캠퍼스 특유의 소란함도 없이 조용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벤치 위에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도윤이 도착했을 때 은채는 이미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 화면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어딘가 들떠 있었다. — 왔어? 이거 봐봐. 은채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음성메시지 목록이 떠 있었다. 어제 서윤이 은채에게 보낸 것이라 했다. 도윤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음성메시지: 이서윤, 3분 12초] — 은채야... 흑, 나 진짜 왜 그랬을까...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서윤의 목소리가 이렇게 무너져 있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평소의 서윤은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늘 상대를 밀어내는 쪽이었다. 그런 서윤이 흐느끼고 있었다. — 도윤이가 힘들다고, 상처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 듣고도 헤어지자고 해버렸어. 왜 진심을 말 못 하는 걸까. 나 걔 진짜 좋아하는데. 좋아한다는 말 한 번을 못 해봤어. 메시지는 계속됐다. — 오늘도 옷 예쁘게 입고 왔더라. 나 그거 보고 좋아서 웃음이 나오는데... 왜 입만 열면 나쁜 말이 나가는지 몰라. 걘 몰라. 내가 얼마나... 음성은 흐느끼는 소리로 끝났다. 도윤은 휴대폰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재생이 끝났는데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처음부터 들어보고 싶은 마음과,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게... 진심이라고?' 지난 몇 주간 서윤에게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차갑게 내려다보던 눈. 비웃듯 올라간 입꼬리. 아무렇지 않게 던지던 독한 말들. 그 모든 것이 지금 들은 세 문장짜리 울음과 같은 사람에게서 나온 거라니, 도윤은 그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 은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봤지? 걔, 진짜야.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들었던 독설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 음성이 진짜라면, 그 모든 말들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 숨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해?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았다. 은채는 그런 도윤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 일단 시험해보자. 걔가 진심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은채는 계획을 설명했다. 오늘 오후, 서윤이 자주 가는 도서관 앞 카페에 도윤이 먼저 가 있고, 은채가 서윤을 데리고 그 근처를 지나가며 반응을 살펴본다는 것이었다. — 걔가 널 보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게 전부야. 진심이면 숨길 수 없을 거야.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거웠다. 오후 3시, 계획대로 도윤은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 있었다. 손끝으로 컵의 표면을 문지르며 창밖을 살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 사람들이 오가는 그 자리를 몇 번이고 눈으로 훑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십 분, 이십 분. 도윤은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은채가 서윤을 데리고 카페 앞을 지나갔다. 서윤은 도윤을 발견하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유리창 너머로도 보였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어깨가 미세하게 굳는 것까지 도윤의 눈에 담겼다. 하지만 곧 표정을 다잡고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저 표정.' 도윤의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왔다. 저 눈빛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윤의 눈이 커졌다. 서윤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잘 차려입은 그 남자는 서윤에게 뭔가 말을 건네며 웃고 있었다. 서윤도...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 도윤을 보고 흔들리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를 향해서는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뭐야.' 도윤의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무의식중에 꽉 움켜쥐었다. 은채가 급히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 — 야, 저 남자 뭐야? — 나도 몰라! 갑자기 나타나서 서윤이한테 붙었어. 경영학과 선배라던데, 요즘 자꾸 서윤이한테 관심 있다고 들이대는 사람이야. 도윤은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서윤은 여전히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헤어졌다는 사실이, 그 웃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울면서 좋아한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저렇게 웃어?' 의심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제 들었던 음성메시지가 거짓이었나, 아니면 저 순간의 웃음이 거짓이었나. 도윤은 판단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와 지금 저 편안한 웃음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도무지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은채는 도윤의 표정을 살피며 급히 손을 저었다. —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서윤이가 저 사람을 좋아해서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예의상 웃는 거야. 걘 원래 낯선 사람한테도 표면적으로 친절해. — 그걸 어떻게 확신해? 도윤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은채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말을 이었다. — 내가 걜 십 년 넘게 봤으니까! 도윤아, 방금 그 음성 들었잖아. 저게 거짓말이면 내가 왜 너한테 몰래 이런 걸 보여주겠어? 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은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본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서윤의 그 웃음이, 도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표정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 헤집어 놓았다. 서윤과 그 남자는 곧 헤어져 각자 방향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도윤의 눈은 그 뒷모습을 좇았다. 서윤이 사라지자, 은채는 도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도윤아. 나 믿어. 이대로 걜 놓치면 너 진짜 후회할 거야. 내가 확실한 방법을 알아. 이걸로 서윤이 진심을 완전히 끌어낼 수 있어. 도윤의 눈빛이 서서히 진지해졌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시선이 어느새 은채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 ...무슨 방법인데. 은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어딘가 지나치게 여유로워서, 마치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 작전을 짜자. 너한테 시킬 게 있어. 카페 안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은채의 눈을 마주 보며, 그 안에 담긴 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위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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