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정우진이 애들 데리고 나 기다리고 있었어."
결국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강서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놀람보다 먼저 온 것은 분노였다.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더니, 곧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뭐? 언제."
"오늘 방과 후에. 별일 없었어. 그냥 겁만 주다가 갔어."
"별일 없었다니, 셋이서 너 하나 둘러싼 거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내가 얘기할게. 걔한테."
"그러지 마."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손목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내 손바닥까지 전해져 왔다.
"네가 나서면 더 복잡해져. 걘 지금 너 때문에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야."
"근데 그게 왜 네가 감당해야 할 문제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이 그랬다. 이건 애초에 강서연과 정우진 사이의 문제였고, 나는 우연히 그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였다. 그런데도 모든 화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억울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감정의 이유를 나는 애써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냥, 조심할게. 늦게 남지 않고."
"그런 대책으로 되겠어?"
그녀는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팔짱을 낀 채 몇 걸음을 왔다 갔다 하더니,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내일부터 같이 등하교하자."
"뭐?"
"같은 시간에 나오고, 같이 가는 거야. 그럼 혼자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나는 그 제안에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확했지만, 그 제안이 가져올 파장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우리 둘의 관계는 반 전체의 화제였다. 등하교까지 함께한다면, 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그러면 애들이 더 이상해할 거야."
"이상해하라고 해."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그 단호함 앞에서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등을 돌려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마치 논의는 끝났다는 듯이.
"진짜 후회 안 해?"
"내가 왜 후회를 해."
그녀가 어깨너머로 대답했다. 짧은 한마디였는데도, 그 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걸음을 뗐다.
결국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는 학교 앞 골목에서 만나 함께 걷기 시작했다.
첫날 아침,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오 분이나 먼저 나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었는데, 그 손짓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내가 더 위화감을 느꼈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보폭을 맞추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발걸음이 같은 박자를 타고 있었다.
예상대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시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수군거렸고, 몇몇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웃음을 참지 못했다.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웅성거림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걸,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둘이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그 말이 교실 안을 떠돌았다. 나는 그 말들을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못 들은 척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그 소문은 살을 붙이고 부풀어 올랐다. 누군가는 우리가 손을 잡은 걸 봤다고 했고, 누군가는 우리가 이미 사귄 지 한 달이 넘었다고 떠들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아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정우진은 그 며칠 동안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도, 급식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그 조용함 뒤에 무언가가 준비되고 있다는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나는 자꾸 정우진이 앉은 자리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는 태연하게 필기를 하고 있었고,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태연함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가 나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이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애씀은, 대체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때 나오는 법이었다.
"요즘 조용하네. 정우진."
어느 날 점심시간, 벤치에서 강서연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도시락을 정리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찬통 뚜껑을 닫는 손길이 평소보다 느렸다.
"조용한 게 더 무서워."
그녀의 말이 내 안의 불안을 그대로 대변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걘 원래 그래. 화가 나면 바로 터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침착해져.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확 몰아붙이는 거야."
"그럼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냥 조심하는 수밖에. 나도 최대한 걔랑 안 마주치려고 하고 있어."
그녀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평소의 단호함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그녀도 두려운 거였다. 다만 나에게 그걸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
"근데 나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큰 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단순한 감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날 골목에서, 아무도 안 도와줬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면 무서워. 근데 네가 왔잖아."
"그건... 우연히."
"우연이라도 좋아. 도와준 사람이 너였다는 게 좋아."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갈비뼈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현이 단순한 친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그 느낌을 밀어냈다. 그런 착각을 하기엔, 나는 아직 나 자신을 그런 대상으로 여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넌 안 무서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섭지. 근데 무서워한다고 안 마주치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데."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조심하고 있잖아. 지금도."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무튼, 고마워. 계속."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웃음을 마주하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는 얼굴을 오래 마주 보고 있으니 괜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시선을 돌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그녀가 문득 물었다.
"오늘도 같이 가는 거지?"
"당연하지."
내 대답에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 웃음이 오후 수업 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담임에게 불려갔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잠깐 남으라는 말이었다. 강서연은 먼저 가라는 내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자리를 떴다.
"진짜 괜찮아?"
"응, 별거 아닐 거야. 성적 얘기겠지."
"끝나면 문자해."
그녀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교무실로 향했다.
담임과의 대화는 정말로 별거 아니었다. 최근 성적이 떨어진 것에 대한 형식적인 잔소리와, 진로에 대한 몇 마디 질문이 전부였다. 나는 대충 대답을 하고,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보냈다. 마음은 이미 교문 밖, 골목길, 강서연이 걷고 있을 그 길에 가 있었다.
교무실에서 담임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건 예상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학교는 이미 대부분 비어 있었고,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울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이미 짙은 남색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골목 어귀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둠이 깔린 골목 안쪽, 낯익은 실루엣이 서 있었다.
정우진이었다.
혼자였다. 지난번처럼 무리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이전의 폭력적인 분노보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반쪽만을 비추고 있어서, 나머지 반쪽은 어둠에 잠겨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발끝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도망칠까, 아니면 소리를 질러야 할까. 머릿속에서 여러 선택지가 동시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교문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야. 무섭지?"
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이 진작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한,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나는 도망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다리가 이미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내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웠다.
"할 말은 이미 다 했잖아. 근데 넌 못 알아들은 것 같더라고."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게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연이랑 진짜 끝까지 갈 생각인가 본데,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말과 함께,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