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벤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은행나무 아래, 낡은 나무 벤치.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마다 나이테 같은 무늬가 드러나 있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 벤치가 나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그곳에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강서연이었다.
검은 숏컷 머리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어야 했다. 나만의 영토였다. 이 주 가까이 아무에게도 침범받지 않았던, 유일하게 완전한 나만의 공간.
그런데 그 영토 한가운데, 그녀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여기서 밥 먹는다며."
그녀가 벤치를 두드리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손짓 하나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결국 다가가 앉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도망칠까 잠깐 생각했지만, 도망친다는 게 더 이상해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
"물어봤어. 너 반에서 유일하게 혼자 벤치에서 먹는 애라고 하더라고."
그 말이 왜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 존재 방식 자체가 웃음거리로 정리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도시락 통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도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보온 도시락통. 뚜껑을 여는 손길이 익숙했다.
"이거 먹어봐."
그녀가 통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계란말이와 볶음김치, 정갈하게 담긴 흰밥. 어제까지의 내 도시락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성이 담긴 모양새였다. 김이 살짝 올라오는 것을 보니 아침에 직접 만든 게 분명했다.
"뭐야, 이거."
"도시락. 어제 고마워서 만들었어."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 단호함 앞에서 더 이상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고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짭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따뜻한 음식이었다. 계란말이 안에 다진 파와 당근이 섬세하게 섞여 있었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간이 딱 맞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만큼의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맛있어?"
"어... 응."
"내일도 만들어 올게."
"내일도?"
나는 놀라서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녀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표현은 한 번으로 안 끝나.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 말이 어쩐지 무겁게 들렸다. 단순한 친절의 표현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정 짓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밥을 삼키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큰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치 그 눈이 내 안의 무언가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정말로 강서연은 매일 벤치로 찾아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번 다른 메뉴의 도시락을 들고. 어느 날은 소고기볶음과 잡채, 어느 날은 김밥과 미역국을 작은 보온병에 담아왔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시간이 조금씩 익숙한 리듬으로 자리 잡아갔다.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이었고, 나는 대부분 듣는 쪽이었지만, 그 침묵도 나름의 방식으로 편안했다.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그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어느샌가 그 벤치는 예전과는 다른 의미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너는 왜 항상 조용해?"
어느 날 그녀가 문득 물었다. 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딸 게 별로 없어서."
"거짓말. 눈은 계속 뭔가 말하고 있는데."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웃을 수 없었다. 내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도현이랑 2반 강서연이 매일 같이 밥 먹는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 소문은 교실 전체를 휩쓸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예전에는 투명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 관심이 반가운 게 아니라 불편했다. 마치 유리병 속에 갇혀서 사방에서 관찰당하는 기분이었다.
"야, 너 강서연이랑 뭐야?"
같은 반 남자애가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조차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부럽다, 진짜."
또 다른 애가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나는 그 손길에도 몸이 굳었다. 익숙하지 않은 관심은 오히려 위협처럼 느껴졌다. 등 뒤로 쏘아지는 눈빛들이 하나하나 살갗에 박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조용히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강서연이라는 존재가 내 일상의 지형을 통째로 바꿔놓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칠판 위의 글씨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들이 더 크게 들렸다. "쟤 좀 이상한 애 아니었어?" "왜 강서연이 저런 애랑 다녀?" 그런 말들이 귀에 박히듯 스쳤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지만,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점심시간, 벤치로 향하는 길에 나는 강서연에게 그 불편함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 사실 이런 관심 별로 안 좋아해."
그녀는 도시락 뚜껑을 열다가 나를 바라봤다.
"어떤 관심?"
"너랑 나 얘기하는 거. 애들이 이상하게 봐."
"이상하게? 왜?"
그녀의 물음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몇 년 동안 쌓아온 습관과 방어벽을 어떻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나 원래 눈에 안 띄는 애였어. 그게 편했고."
"근데 지금은 눈에 띄고 있고."
"그래서 불편해."
그녀는 내 말을 곱씹는 듯 잠시 침묵했다. 젓가락 끝으로 도시락 뚜껑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 정적을 채웠다. 그러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눈에 안 띄는 게 편한 거랑, 눈에 안 띄어서 외로운 거랑, 둘 다 진짜야?"
그 질문이 폐부를 찔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막힐 듯한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젓가락을 들고 계란말이를 내 도시락 위에 올려놓았다.
"난 그냥 계속 올 거야. 불편해도."
"왜."
"고마운 마음은 한 번 표현하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완강해 보였다. 마치 어떤 결심을 이미 오래전에 끝내놓은 사람 같은 웃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반박할 힘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부드러운 그 맛이, 오늘은 이상하게 목구멍에 걸렸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 잘 못 하는구나, 너."
그녀는 낮게 웃으며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이 관계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두려워졌다. 궁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낯설었다.
그날 오후, 나는 복도에서 정우진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쳤지만,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의 눈빛에 담긴 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한이었다. 골목에서 도망친 그날 이후로 쌓여만 갔을, 짓눌린 감정이 그 눈빛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사냥감을 놓친 짐승이 다시 기회를 노리는 듯한, 차갑고 집요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날의 골목, 그날의 숨소리, 그날의 발소리가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잊고 지내려 했던 기억들이 그 짧은 눈빛 하나에 전부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눈빛은, 곧 다시 나를 향해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