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저녁 무렵, 이도현은 서재로 딸을 불렀다. 하인이 전한 말은 짧았으나, 서윤은 그 짧음 속에 담긴 무게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서재는 늘 그렇듯 오래된 책 냄새와 벽난로의 장작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그 익숙한 냄새가 서윤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나, 오늘은 그 기억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벽을 따라 늘어선 책장의 가죽 냄새, 벽난로 속에서 타들어가는 장작이 탁, 탁 소리를 내며 튀는 불티, 그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었는데도 서윤의 발걸음만은 유독 무거웠다.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던 서윤은, 문고리를 잡은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그 시선들, 그 웅성거림,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낮은 비웃음들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서윤은 그것을 떨쳐내려 짧게 숨을 내쉬고서야 문을 열었다.
이도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를 권했고, 서윤은 그 권유에 조용히 따라 앉았다. 소파의 낡은 천이 손끝에 닿는 감촉이 익숙했으나, 오늘은 그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도현은 한동안 딸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딸을 향한 걱정과, 동시에 아버지로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는 망설임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어제의 일은 이미 황도 전체에 퍼졌다."
이도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그 담담함 속에는 억누른 분노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리다가, 그마저도 스스로 알아차린 듯 멈추었다.
"사교계는 잔인한 곳이라, 이번 일을 두고 온갖 말들이 나돌겠지. 강씨 공작가에서도 사과의 뜻을 전해왔으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서윤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그 숙임이 슬픔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예의였는지,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저녁 빛이 소파의 팔걸이 위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서윤은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형식적인 사과라니,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서윤의 그 짧은 대답에, 이도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딸이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토로할 것이라 예상했던 그였기에, 이 지나칠 정도로 담담한 대답이 오히려 더 걱정스러웠다. 손끝으로 서랍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이도현은, 딸의 표정에서 어떤 균열도 찾아내지 못한 채 그저 그 담담함만을 마주해야 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이도현이 낮게 말하며 딸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 속에는 딸의 진심을 캐묻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더 이상 다그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그는 딸이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울지 않고 그저 옷자락을 꾹 쥐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프다는 말 한마디를 좀처럼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마른 잎사귀 몇 개를 흩날리고 있었다.
"저는 그저, 이곳에 더 있는 것이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딸이 도망치듯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 말 속에서 딸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려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이 아이가 이렇게 자신의 뜻을 말한 적이 있었나.'
이도현은 딸을 바라보며, 그동안 얼마나 이 아이의 속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언제나 순종적이었던 딸이었고, 그것이 무던함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그 무던함이 그저 감정을 삼키는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이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정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청하 영지로 가고 싶으냐."
이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하는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의 영지로, 이씨 가문 소유의 오래된 저택이 있는 곳이었는데,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그곳은 사교계의 소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릴 적 몇 번 여름을 보냈던 그곳의 기억이 서윤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넓은 초원과 낮은 산등성이, 그리고 사람보다 양이 더 많던 마을.
서윤은 그 물음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소파의 천을 매만지며,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손톱 끝으로 천의 결을 따라가다가, 문득 그 결이 자신의 마음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곳에 가면, 이 시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정말로 벗어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서윤의 입에서 먼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아버지. 그러고 싶습니다."
이도현은 딸의 그 대답을 듣고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는 딸의 얼굴에서 어떤 결연함을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동시에 그 결연함 뒤에 감춰진 두려움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낯선 무대에 홀로 서기로 결심한 배우의 얼굴 같았고, 그 무대 뒤에서 관객의 야유를 예상하면서도 커튼을 걷어 올리려는 것 같았다.
이도현은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로 그것이 딸의 뜻인지, 아니면 그저 이 순간을 벗어나고픈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 그러나 그는 그 물음을 삼켰다. 더 캐묻는다면, 딸이 지금 애써 세운 그 담담함마저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겠다. 준비해두겠다."
그 짧은 대답으로 결정은 내려졌다. 서윤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재를 나섰는데, 복도를 걸으며 자신이 방금 무언가 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복도의 촛대에서 흔들리는 불빛이 벽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서윤은 그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문득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낯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서윤은 자신의 방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문 안쪽에서는 시녀가 이미 촛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고,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함조차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서윤의 가슴 한구석을 조용히 눌러왔다.
'청하라니. 그곳에서 나는 대체 뭘 하며 지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서윤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짧게 웃었다. 사교계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떠나는 처지에,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지를 걱정하고 있다니.
서재에 남은 이도현은 창밖의 어두운 정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딸을 멀리 보내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곳에서 매일 쏟아지는 시선과 소문 속에 딸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원 너머 담장 위로 낮게 깔린 어둠이, 마치 이 저택 전체를 감싸는 무거운 천처럼 느껴졌다.
'저 아이가 그곳에서 무엇을 찾게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도현은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장작이 타들어가며 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그는 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날 밤, 이도현은 집사장 최노식을 따로 불러 청하 영지행에 대한 준비를 지시했고, 최노식은 그 지시를 받으며 오랫동안 몸담아온 황도의 삶을 정리할 마음의 준비를 조용히 시작했다. 최노식은 몇 번이고 되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이도현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언제 떠나시는 겁니까."
최노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급적 빨리. 소문이 가라앉기 전에."
이도현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조급함을 최노식은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몇 주에 걸쳐 천천히 준비했을 여정이, 이번에는 며칠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최노식은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서며, 마차와 호위, 그리고 청하 저택에 미리 보낼 전령까지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가 정말로 그 조용한 변경에서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그 밤, 저택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는 사이에도 서윤의 방 창문만은 오래도록 밝혀져 있었다. 짐을 꾸리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으나, 서윤은 옷장 앞에 서서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두고 갈지 가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결정의 무게가,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 얼굴로 창밖의 어둠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