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애가 내 의붓동생이라니

5화

며칠 뒤, 나래의 소속사에서 오프라인 팬미팅을 급하게 잡았다. 스캔들을 정면으로 돌파하자는 전략이었다. 회의실에서 대표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 숨기면 더 커집니다. 지금은 정면으로 부딪혀야 해요. 나래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무릎 위에 놓인 손끝이 계속 옷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 그래서요? 저보고 대체 뭘 하라는 거예요. — 팬미팅에서 직접 말씀하세요. 여자친구가 있다고. 대신 얼굴은 공개 안 합니다. 뒤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해요. 그날 밤, 나래는 서윤의 집으로 왔다. 손에는 마스크와 모자가 들려 있었다. — 언니가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얼굴 공개는 안 하니까. 서윤은 그것들을 받아 거울 앞에 섰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썼다. 거울 속에는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내가 최애 팬미팅 스태프처럼 서 있게 될 줄은 몰랐지.' 한숨이 마스크 안에서 뜨겁게 부딪혔다가 흩어졌다. — 왜, 별로예요? 나래가 뒤에서 물었다. 서윤은 거울 속 나래를 바라봤다. — 아니. 그냥... 이상해서. 몇 달 전까지 나는 저 팬미팅에 표 구하려고 새벽부터 줄 서던 사람이었는데. — 지금은요? — 지금은 그 사람 손을 잡고 무대 옆에 서 있게 됐네. 나래가 픽 웃었다. 그러나 웃음 끝이 어딘가 무거웠다. 행사 당일. 행사장은 이미 인파로 가득했다. 대기실 안,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래는 무대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발랐다. 서윤은 그 옆, 어두운 벽 쪽에 서서 기다렸다. — 긴장돼요? 나래가 거울을 보며 물었다. — 언니가 긴장돼야 할 판이잖아. 나야 그냥... 배경이니까. — 배경 아니에요. 오늘은. 나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서윤은 그 말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조명 아래 나래가 서자 함성이 터졌다. — 나래야!! 사랑해!! 수백 개의 응원봉이 일제히 흔들리며 빛을 뿜었다. 함성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갔다. 서윤은 무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팬으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손끝이 저절로 움직이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저기 서 있고 싶다. 저 함성을 같이 지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애인 역할이라는 낯선 자리에서. 마스크 안으로 숨이 뜨겁게 갇혔다. 토크가 이어졌다. 팬들의 질문, 나래의 능숙한 대답, 웃음소리. 겉으로는 평범한 팬미팅이었다. 하지만 공기 어딘가에 미묘한 긴장이 깔려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오늘, 그 얘기가 나올 거란 걸. 행사 중간, 사회자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 나래님, 최근 논란에 대해 직접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객석이 조용해졌다. 응원봉 불빛만 잔잔하게 흔들렸다. 나래가 마이크를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 그 방송, 오해가 좀 있었어요. 그날은 그냥 친구로서 게임한 거고... 사실 저, 여자친구가 있어요. 객석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곧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과 놀란 숨소리가 뒤섞였다. — 진짜야? — 헐, 대박 — 여자친구라니? 그때, 객석 한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 그거 다 조작 아니에요? 사진 한 장으로 여자친구라니, 너무 뻔한 여론전 아닙니까! 장내가 조용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앞줄에 앉은, 헤드셋을 목에 건 남자였다. 서윤은 낯이 익었다. 유출 영상 속 그 프로게이머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스크 안으로 숨이 가빠졌다. 나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곧 다시 미소로 덮였다. 그 전환은 아주 빨랐다. 마치 오래 연습한 사람처럼. — 조작이라니요. 직접 확인시켜드릴까요? 나래가 무대에서 내려와 서윤 쪽으로 걸어왔다.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정적 속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한 사람을 향해 모이는 순간, 서윤은 자신의 다리가 굳어버린 걸 느꼈다. — 언니. 나래가 작게 불렀다. 서윤이 숨을 멈췄다. '설마.' 나래는 서윤의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얼굴 절반이 드러났다. 플래시가 터졌다. 찰칵. 찰칵. 수십 개의 렌즈가 동시에 서윤을 향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굴, 얼굴이 나오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래의 손이 그 순간 서윤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단단했다. 나래가 서윤의 손을 잡고 관객을 향해 웃었다. — 여러분, 이 사람이 제 여자친구예요. 이제 됐죠? 환호와 탄식이 뒤섞여 터졌다. 몇몇은 놀라 입을 가렸고, 몇몇은 응원봉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나래의 이름을 불렀다. 프로게이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드셋을 목에서 풀어내며, 마이크도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 재밌네요. 그럼 저도 오늘부로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나래씨한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 여자친구라는 분, 진짜인지 아닌지 두고 보죠. 장내가 다시 얼어붙었다. 응원봉 빛조차 잠시 멈춘 듯했다. 서윤은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었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뭐, 뭐라고—'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고백을 거절당했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럼 저 남자는 정말로 나래를 좋아했었다는 건가. 그리고 지금, 왜 굳이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걸까. 나래의 손이 서윤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웃음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 재밌는 분이시네요. 그럼 이 얘기는, 방송에서 계속 하죠. 나래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하지만 서윤은 그 침착함이 얇은 얼음 같다는 걸 알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쩍, 갈라질 것 같은. 관객석 곳곳에서 휴대폰 카메라가 두 사람을 향해 들렸다. 플래시가 계속해서 터졌다. 서윤은 그 빛 속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사회자가 다급하게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 자, 자, 오늘은 팬미팅이니까요. 이 얘기는 여기서—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객석은 술렁였고,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프로게이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서윤의 눈에는 유독 오래 남았다. 서윤은 나래의 손을 마주 잡은 채, 그 시선들 속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 무대 위 조명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 서윤은 마스크를 반쯗 내린 채, 자신을 향한 수백 개의 시선과 렌즈 속에서 도망칠 곳 없이 서 있었다. 나래의 손을 잡은 손끝이 떨렸다. 이 손을 놓으면,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프로게이머의 마지막 말은 서윤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말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이 서윤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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