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계약이 성립된 다음 날부터, 서윤의 일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등교 전 아침, 나래가 서윤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 언니, 오늘 촬영 있는 거 알죠?
— 촬영이라니, 나 학교 가야—
— 짧게 할게요. 십 분이면 돼요.
서윤은 거울 앞에 억지로 앉혀졌다. 침대 위에는 이미 조명 스탠드가 세팅되어 있었고, 삼각대 위에 올라간 스마트폰이 서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 저런 걸 다 챙겨온 거야...'
나래가 손수 서윤의 머리를 다듬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스칠 때마다 서윤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나래의 손가락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걸 만지듯이.
'이건 팬서비스가 아니라 진짜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 언니, 목 좀 이쪽으로.
— 이, 이렇게?
— 조금만 더.
나래의 얼굴이 순간 가까워졌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서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 자, 이제 카메라 보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 자, 자연스럽게 어떻게—
— 그냥 저 보고 웃던 대로 웃으면 돼요.
서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나래가 그런 서윤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찰칵.
나래가 스마트폰으로 서윤의 옆얼굴을 찍었다. 팔짱을 끼듯 어깨에 손을 올린 채였다. 화면 속에는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은 각도, 서윤의 붉어진 귀끝,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좋아요. 이 정도면 떡밥 되겠다.
— 이거... 얼굴 나온 거 아니야?
— 각도 잘 잡았으니까 걱정 마요. 반쪽만 보이게 크롭했어요.
서윤은 그제야 안심하며 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등교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그날 오후, 나래의 SNS 스토리에 사진이 하나 올라왔다. 얼굴은 가려졌지만, 옆에 붙은 문구는 선명했다.
[요즘 제일 소중한 사람이랑 :)]
댓글창이 폭발했다.
— 나래님 여자친구 있으셨어요?? 미쳤다
— 그 프로게이머 루머는 뭐였던 거??
— 언니 정체 궁금해 죽겠다
— 저 어깨선 진짜 예쁘다ㅠㅠ 누구세요
— 나래님 표정 봐 완전 행복해보임
서윤은 학교 화장실에서 몰래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회수가 벌써 수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댓글은 5분 단위로 새로 갱신됐다.
'이거 진짜 커지고 있잖아.'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든 채로 화장실 칸에 한동안 서 있었다. 밖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윤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나 이거... 되돌릴 수 있는 거 맞나.'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흘러갔다. 서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사진과, 나래의 손끝이 스치던 감촉만이 맴돌았다.
집에 돌아오자 나래가 노트북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방송 플랫폼의 대시보드가 떠 있었다.
— 다음 단계는 실전이에요.
— 실전?
— 오늘 밤 방송에서 언니 목소리, 잠깐 내보낼 거예요. 얼굴은 안 나오니까 걱정 말고.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 나, 나 방송 처음 하는 건데—
— 괜찮아요. 그냥 제 옆에서 리액션만 하면 돼요.
— 그, 그래도—
— 언니.
나래가 서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이제 와서 무를 순 없어요. 계약, 기억하죠?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속에 담긴 무게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먼저 손 내민 거였잖아.'
— 알겠어. 뭘 하면 되는데.
— 좋아요. 자, 그럼 준비합시다.
나래가 방을 정돈하는 사이, 서윤은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손끝이 계속 차가웠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게,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밤 아홉 시, 방송이 시작됐다. 서윤은 나래 옆에 앉아 마이크를 앞에 두고 손끝을 꽉 쥐었다. 마이크의 낮은 웅웅거림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나래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분이랑 같이 있어요.
채팅창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누구야??]
[여자친구??]
[목소리만 들려줘!!]
[드디어 나오는 거야?]
[심장 떨린다 진짜]
나래가 서윤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 손길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서윤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 안,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채팅창이 다시 폭발했다.
[목소리 좋다]
[이거 실화냐]
[진짜 여자친구인가봐]
[울 것 같은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설레]
[나래 표정 봐 완전 웃고 있어]
나래는 옆에서 계속 웃고 있었다. 서윤은 그 웃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순간, 서윤의 눈에 낯익은 닉네임이 스쳤다.
[유니콘_서윤짱]
서윤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저건... 내 후원 계정 닉네임이잖아.'
숨이 턱 막혔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나래가 저 닉네임을 볼까 두려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행히 이름은 흔했다. 하지만 채팅이 이어졌다.
[유니콘_서윤짱: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유니콘_서윤짱: 왜 이렇게 낯익지]
서윤은 숨을 삼켰다. 옆에 있던 나래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자, 게임 시작할까요? 다들 집중!
방송은 무사히 넘어갔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채팅창은 다시 게임 관련 이야기로 채워졌고, 그 닉네임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서윤은 조금씩 숨을 돌렸다.
'다행이야... 그냥 넘어갔나 봐.'
하지만 방송이 끝난 뒤, 나래가 노트북을 덮으며 말했다.
— 언니, 방금 그 닉네임 뭐예요.
서윤의 얼굴이 하얘졌다.
— 그, 그게—
— 설마 언니 계정이에요?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꽉 말려들었다. 뭐라도 변명을 해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래가 조용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이 서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 언니.
— ...
— 그동안 제 방송, 계속 보고 있었던 거예요?
서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았다. 노트북 화면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던 닉네임 하나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 이거 재밌어지네.
나래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서린 무언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서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들켰다. 완전히 들켰어.'
그리고 나래가 몸을 살짝 기울였다. 서윤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나래가 낮게 속삭였다.
— 그럼 이제부터, 진짜 재밌는 얘기 좀 해볼까요,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