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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탁. 의료진이 트레이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리벽을 타고 울렸다. 은색 원통에 투명한 튜브가 연결된 물건이었다. 채혈 도구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했고, 링거대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튜브 끝에는 가느다란 캐뉼러가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은근히 예쁘게 만들었다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저 반짝임은 절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좋은 예감이 아니라는 걸. 이서연으로 살던 서른두 해 동안,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주사도 잘 맞았고, 채혈도 눈 뜨고 지켜보는 강심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강하준의 몸으로 누워 있는 이 순간만큼은 뭔가 다른 종류의 공포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본능이 먼저 알아챈 거다. 저 은색 원통이 향할 곳이 어디인지. "강하준 님."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담담하게 나를 불렀다. 담담한 게 더 무서웠다. 이 사람들은 익숙한 거다. 이 일을. 이 절차를. 이 모든 미친 짓거리를. 마치 편의점 알바가 삼각김밥 유통기한 확인하듯,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이게 뭡니까." "정기 시술 장비입니다. 성선 자극과 채취를 동시에 진행합니다." 성선. 자극. 채취.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조합되는 순간, 나는 이 세계관의 '생체 자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렸다. 아, 이거 그냥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었구나. 진짜로, 리얼로, 물리적으로. 순간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건 심장이 아니라 다른 부위가 쥐어짜일 예정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정정하자면 심장은 그냥 미리 놀란 거고,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꼭 이 방법이어야 합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이서연이었을 때는 웬만한 일에 목소리 안 떨렸는데. "국가 유전자 보존 사업의 최우선 항목입니다. 다솜국 남성 개체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자연 생식이 아닌 인공 배양 방식으로만 인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이 너무 깔끔했다. 마치 매뉴얼을 읽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매뉴얼을 읽는 거였을 거다. 저 여자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감정이라는 변수가 애초에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은 눈빛. "통증이 있습니까." 짧은 침묵. "……있습니다." 됐다. 그거면 충분한 답이었다. 더 물을 것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정신 승리뿐이었다. 캐뉼러가 살에 닿는 순간, 나는 이서연이었던 전생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후회를 느꼈다. 이세계 전생물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서도 이런 전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로판 여주는 다 예쁘고 부유하고 잘생긴 남주를 만났지, 성별 역전 세계에서 정부 소유의 생체 자원이 되는 전개는 없었다. 있었다면 내가 그 작품을 씹어먹으면서 읽었을 텐데, 없었다. 없어서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거다. 작가가 있다면 항의하고 싶었다. 이보세요, 장르 태그에 하드코어라고 좀 적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애초에 이건 로판이 아니라 무슨 산업 다큐멘터리 아닙니까. "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참으려 했는데 안 됐다. 신체 감각이라는 게 이렇게 정직할 줄이야. 머리로는 침착하자, 침착하자 되뇌었는데 몸은 그 명령을 완전히 무시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고, 손끝이 시트를 움켜쥐었다. 의료진은 아무 반응 없이 자기 할 일을 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마치 부품을 조립하는 기술자처럼, 절도 있고 정확했다. 그 정확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화면 어딘가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서지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스피커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유독 무겁게 방 안을 눌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통증과 수치심이 뒤섞인 시간은 유독 느리게 갔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방인데, 나는 자꾸 초침 소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이 지옥 같은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게 어이없이 위안이 됐다. 끝났을 때, 나는 침대에 축 늘어진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방금 마라톤을 완주한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이게 앞으로 정기적으로 반복될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정기적으로. 반복. 국가 유전자 보존 사업. 최우선 항목.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몇 번이나. 마치 고장 난 스피커처럼. 그리고 그 몇 초 뒤, 나는 결심했다. 주인공이 되지 않겠다고. 로판 속 남주처럼 뭔가를 쟁취하겠다는 야망도, 사랑을 위해 세상을 뒤엎겠다는 열정도, 전부 다 버리겠다고. 나는 이 세계의 배경이 되기로 했다. 시스템이 되기로 했다. 그냥 국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소모되고, 그 대가로 소망보육원 애들 몇 명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거면 됐다. 감정 없이. 욕심 없이. 조용히. 이서연이었을 때 나는 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남들 눈에 띄고, 인정받고,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눈에 안 띄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그냥 숫자였으면 좋겠다. 강하준이라는 이름도, 얼굴도, 다 지우고 그냥 생체 자원 몇 번으로 남고 싶었다. 그게 훨씬 덜 아플 것 같았다. "강하준 님." 스피커에서 서지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건조하고 사무적인 톤이었지만, 뭔가 미묘하게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아주 살짝, 머뭇거리는 것 같은. "수고하셨습니다." "……이게 수고했다는 말로 끝날 일입니까."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대들 힘이 남아있었나 싶었는데, 몸은 지쳤어도 감정은 아직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짧은 정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뭐지. 사무적인 사람이 이렇게 사과하는 게 낯설었다. 지금까지 봐온 서지은은 매뉴얼에서 벗어나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대충 대답을 흘려 넘기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뭔가를 더 생각할 기력조차 없었다. 몸은 여전히 축축했고, 하복부는 낯선 감각으로 얼얼했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덮었다. 아무도 나를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다음 주에 총리님께서 참석하시는 공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강하준 님의 참석이 필요합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까지 무겁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프링처럼 튕겨 올라갔다. "……뭐라고요?" 총리. 공식 행사. 참석. 이 세 단어의 조합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목덜미를 타고 스쳤다. 좋은 일로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이상하게도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스피커는 이미 꺼져 있었다. 침묵만이 방을 채웠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총리가 참석하는 자리에, 왜 나 같은 '생체 자원'이 필요하다는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 머릿속에 쌓여갔고, 몸은 지쳐 있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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