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산 여왕의 사냥감이 됐다

5화

"소라야." 나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끄윽- 그 소리가 카페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소라의 눈이 나와 서리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서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커피잔 손잡이를 매만지는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긴... 왜." 소라가 물었다. 나에게 묻는 건지, 서리에게 묻는 건지 애매했다.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냥, 얘기할 게 있어서." 내 대답은 스스로도 어설프게 들렸다. 말을 뱉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궁색한 변명인지 깨달았다. 소라의 시선이 서리에게 옮겨갔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었다. 서리의 단정한 원피스, 노트북, 그 앞에 놓인 두 개의 잔. 하나는 이미 절반쯤 비어 있었다. "저기, 실례지만 두 분이 어떤 관계예요?" 소라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게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런 소라를 처음 봤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큰소리 한 번 낸 적 없던 애였다. 항상 웃는 얼굴로 먼저 양보하던, 그런 애였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낯설었다. 서리가 여유롭게 웃었다. 처음 미팅 자리에서 봤던 그 얌전한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눈은 반달처럼 접히는. 누가 봐도 선량해 보이는 웃음. "그냥 아는 사이예요." "아는 사이인데 이렇게 둘이서 카페에서 만나요?" 소라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카페 안의 몇몇 사람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옆 테이블의 커플이 대화를 멈추고 우리를 슬쩍 살폈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소라야,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 소라가 나를 똑바로 봤다. 눈에 물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리의 노트북 화면 모서리만 바라봤다. "준서 너, 요즘 계속 이상했잖아. 연락도 잘 안 되고, 만나면 딴생각하는 것 같고. 그게 이 사람 때문이었어?"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최근 몇 주간 내 정신은 온통 한서리라는 존재에 쏠려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휴대폰이 울리면 심장이 내려앉았고, 강의를 듣다가도 문득 정신이 딴 곳으로 흘러갔다. 그 딴 곳이 항상 서리였다. 소라의 손이 살짝 떨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거야. 네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아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화가 났다가, 서운해졌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는 그 감정의 흐름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소라야, 미안해. 요즘 좀 정신이 없었어." "정신이 없었다고?" 소라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이번엔 확실히 화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서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예리해졌다. "저기요, 준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리의 눈빛이 아주 살짝 서늘해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려서,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짓이라뇨.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만나는 거예요." 말투는 여전히 나긋나긋했다. 하지만 그 나긋함 뒤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갑자기요?" 소라의 의심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이 관계가 얼마나 갑작스럽고 비정상적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복도에서 있었던 일, 협박당했던 일, 그 모든 걸 소라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다 털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소라는 놀랄 거다. 그리고 서리는- 서리의 눈을 슬쩍 살폈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 경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소라야,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나는 애써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라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았지만, 소라는 참아냈다. 대신 입술 안쪽을 깨문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알겠어. 나중에 얘기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카페를 나갔다.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쾅- 그 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우리 쪽에 머물다가, 곧 흩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은 정적 속에서, 서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준서 씨 좋아하네요." 담담한 어조였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이. "...아니에요." "눈빛 보면 알아요. 저런 눈빛, 저도 잘 알거든요."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말투에서 뭔가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나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서리의 얼굴에 스친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고,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서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트북을 챙기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졌다. "조건은 기억하고 있죠?" "...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 상황에서도 저 여자는 조건을 상기시키는구나. 소라가 방금 저렇게 상처받은 얼굴로 나갔는데도, 서리에게는 아무 감정의 파동도 없어 보였다. "제가 원할 때, 응해주기로 한 거."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사냥꾼의 여유가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한 감정이 섞인 웃음이었다. 어쩌면 방금 소라와의 상황이 그녀에게도 뭔가 영향을 준 걸까. 아니면 내 착각일까. 카페를 나서고,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누군가는 손을 잡고.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나만 혼자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라의 상처받은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서리의 마지막 웃음도 지워지지 않았다. 두 개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가, 서로 겹쳐졌다가, 다시 흩어졌다. 소라는 삼 년 동안 나를 알아온 친구였다.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조용하고 다정한 애. 그런 애가 오늘 나를 향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 서리는... 서리는 대체 뭘까. 나를 협박하고, 조건을 내걸고, 매번 여유롭게 웃는 그 여자는. 이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강하게 들었다. 조건이든 협박이든, 이 모든 걸 그냥 끝내버리고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라와 웃으며 밥을 먹고, 시험 걱정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럴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낮에 있었던 일을 계속 떠올렸다. 소라의 떨리는 손, 서리의 서늘했던 눈빛, 문이 닫히던 소리까지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결심했다. 서리에게 전화를 걸어 조건을 파기하겠다고 말하기로. 손에 휴대폰을 쥐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정도면 됐다. 더 이상은 끌려다니지 않을 거다. 그런데 전화를 걸기도 전에,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 지이잉-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화면을 확인했다. 서리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정확히 그 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이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지금 도서관 앞으로 와요. 할 얘기 있으니까.』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짧은 문장 하나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물러서려던 마음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에 붙잡히고 있었다. 파기하겠다고 말하려던 각오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어쩌면 그녀가 먼저 얘기를 꺼낼지도 몰랐다. 조건을 끝내자고, 이제 그만하자고. 아주 잠깐, 그런 희망 같은 게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럴 리 없었다. 지금까지 서리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배려는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망치는 것도, 맞서는 것도 아닌, 그저 그녀가 부르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문자는 그대로였다. 짧고, 명령 같고, 거절할 수 없는.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