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산 여왕의 사냥감이 됐다

4화

카페는 학교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처음 서리를 만났던 그 프랜차이즈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그곳은 늘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웠는데, 여긴 아니었다. 조명이 낮았고,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었다. 구석에 숨어들기 딱 좋은 구조였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나왔는데도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걸으면서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갈까. 그냥 안 나갈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국 나는 카페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종소리가 났다. 딸랑. 작고 맑은 소리였는데, 그 순간엔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내부를 둘러보다가 창가 쪽 자리를 발견했다. 서리였다. 먼저 와 있었다. 노트북을 펴놓고 뭔가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는데, 화면에 집중한 얼굴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로움이 조금 덜한, 그냥 보통 사람 같은 표정.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곧바로 화면을 덮었다. 탁. "왔네요." "...네."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나는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카페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예전엔 무서움이 전부였다. 그녀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 그걸 무기로 나를 짓누를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손끝이 차가워지고 숨이 막혔다. 지금은 달랐다. 이번엔 조급함이었다. 이 사람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그런 종류의 절박함. "할 얘기가 뭔데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스스로도 낯설었다. 늘 상대의 말을 기다리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던 내가, 지금은 먼저 입을 열고 있었다. 서리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뭔가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솔직히 말할게요. 저 처음엔 그냥 이준서 씨가 입을 열까 봐 감시하려고 한 거였어요." "알아요." "그런데." 그녀가 손가락으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손톱이 유리컵 표면을 긁는 소리가 났다. 스륵. 스륵. "자꾸 도망치니까 재밌어졌어요." "재밌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힘을 줬다. "이준서 씨는 저를 무서워하잖아요. 근데 그게, 그렇게 나쁘지 않더라고요." 나쁜 의도가 없다는 말인지, 오히려 더 나쁜 의도가 있다는 말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뻑뻑했다. "저는 무서운 게 싫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면 안 돼요?" "뭘요." "쫓아다니는 거요. 협박하는 거요. 갑자기 나타나는 거요." 말을 하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서리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것도 안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안 돼요." "왜요." "재밌으니까요." 너무 직설적인 대답이라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제가 재밌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뭔가 다른 게 보였다. 여유가 아니라 조급함 같은. 마치 이 대답을 하면서도 스스로도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그냥 넘겼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럼 조건을 걸어요." "...조건요?"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살짝 높아졌다. "제가 도망 안 치는 대신, 서리 씨도 어느 정도는 절제해요. 무작정 쫓아다니지 말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컵을 만지던 손이 멈췄다. "협상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저한테?" "네." 웃긴 상황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내가, 지금은 조건을 걸고 있었다. 손이 떨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리지 않았다. 이미 도망칠 곳이 다 사라진 이상, 남은 방법은 정면으로 나서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며칠 밤을 새우며 깨달았다. 도망치면 도망친 만큼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주 서는 게 나았다. 서리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굴 전체를 훑는 것 같았다. 눈, 입, 손끝까지.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대신요?" "제가 원할 때는 이준서 씨가 응해줘야 해요." "뭘요." "대화든, 만남이든, 뭐든." 애매한 조건이었다. 너무 넓고, 너무 모호해서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는 그런 조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완전한 거절을 할 수 있는 카드가 나한테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이걸 받아들이면 최소한 매일 쫓기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예측 가능한 위험이 예측 불가능한 위험보다는 낫다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진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의 얼굴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그게 비웃음인지 그냥 만족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손이 컵을 다시 들어올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방금까지 나눈 대화가 마치 일상적인 잡담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금 안도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최소한의 방어선은 그은 거라고. 그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랑. 같은 종소리였는데,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등 뒤에서 났는데도 무언가 서늘한 느낌이 스쳤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었다. 숨이 턱 막혔다. 소라였다. 윤소라.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조용하고 착한 친구. 종종 안부를 묻고, 별거 아닌 이야기로 시시콜콜한 문자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몇 주에 한 번씩은 밥도 같이 먹었다. 나한테는 편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가 이 카페에 있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동네는 소라가 사는 곳도 아니었고, 다니는 학교도 아니었다. 소라의 눈이 나와 서리를 번갈아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선이 오갈수록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준서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작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리를 봤다가, 다시 소라를 봤다가. 심장이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 그 짧은 순간, 카페 안의 다른 소음들이 전부 지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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