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산 여왕의 사냥감이 됐다

3화

다음날, 나는 결심했다. 그 골목으로는 절대 안 간다. 정문으로만 다니고, 강의실도 맨 뒷줄이 아니라 아예 다른 강의동 쪽 계단을 이용해서 우회한다. 지도까지 그렸다. 휴대폰 메모장에 동선을 하나하나 적어놓고,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어느 시간에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서, 어느 복도로 빠져나갈지. 완벽한 계획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별일도 아닌데, 그냥 정문으로 걸어가는 것뿐인데도 손바닥에 땀이 났다.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런데도 자꾸 뒷목이 서늘했다. 1교시를 마치고 나오는 길, 강의동 로비에서 도윤과 마주쳤다. "야, 이준서." 도윤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 짧은 순간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가, 도윤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풀렸다. 요즘 누가 뒤에서 부르기만 해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발소리, 기척, 향 비슷한 냄새만 스쳐도 온몸이 반응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아무것도." 도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그 시선이 얼굴에서 목으로, 다시 눈으로 옮겨가는 게 느껴졌다. "너 요즘 좀 이상해. 얼굴도 안 좋고. 살도 빠진 거 같은데." "그냥 잠을 못 자서." "그래? 그럼 잘됐다. 오늘 저녁에 애들이랑 볼링 치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스트레스 풀고 그런 게 최고야." 나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 사람 많은 곳, 밤늦게, 그것만으로도 벌써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그런데 도윤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렸다. 『서리 언니가 준서 오빠 번호 물어보는데 줘도 돼요?』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도윤이 그걸 알림창에서 확인하려고 화면을 켜는 순간, 나는 그 문장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글자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도윤도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듯 화면을 얼른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뭐야, 뭔데." "아, 아니야. 아무것도." "방금 서리 이름 나온 거 봤는데." 도윤이 당황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음이 어색하게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 그게. 미팅 자리에 있던 애 중에 한 명이 너 번호 궁금해한다고. 별거 아니야.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소개팀 애들끼리 궁금해하는 거." "줬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도윤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아니 아직. 근데 왜, 너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너무 세게 저은 탓에 목이 뻐근했다. "절대 아니야. 절대 주지 마." "왜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해." 도윤이 씩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불길했다. 도윤은 원래 이런 상황에서 더 재밌어하는 성격이었다. 뭔가 캐낼 게 있다고 느끼면 눈이 반짝거리는 애였다. "진짜야. 그냥, 안 좋은 소문 들었어. 그 사람 좀 무서운 사람이라고." "소문? 무슨 소문. 나 처음 듣는데." "됐어, 아무튼 주지 마." 나는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강의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 도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도윤은 결국 내 번호를 줬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물어보니까 알려줬다고 했다. 무의식적으로. 아무 의도 없이. 도윤은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나 역시 그 순간까지는 몰랐다. 이 작은 실수 하나가 나를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그 무의식이 나를 절벽으로 밀어넣었다. 밤 11시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오늘 골목으로 안 왔네요.』 번호를 저장한 지 몇 시간도 안 됐을 텐데, 벌써 확인까지 하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그 골목으로 안 다닌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확인한 걸까. 상상이 자꾸 나쁜 쪽으로 뻗어나갔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뒤집어놨다. 화면이 뒤로 향했는데도 진동이 울릴 때마다 등이 움찔거렸다. 그런데 오 분도 안 돼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무시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 안 온도는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손발이 시렸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골목 벽에 기대던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은 목소리, 웃지 않는 눈. 나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휴대폰은 계속 뒤집힌 채로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다시 진동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언제 다시 울릴지 모른다는 게. 다음날 아침, 나는 도윤을 찾아가서 따졌다. "너 왜 내 번호를 줬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도윤이 커피를 마시다가 흠칫 놀랐다. "어? 아 미안,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큰일이야. 진짜 큰일이야." 도윤이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컵을 내려놓는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뭔데, 뭔 일 있어? 너 눈밑도 시커멓고. 잠 진짜 못 잤구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까. 어깨를 짓누르던 그 손,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 벽에 밀렸을 때의 감각까지 전부. 하지만 그녀의 협박이 떠올랐다. 입 다물고 있으라는 그 낮은 목소리. 만약 말했다가 도윤한테까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야. 그냥 좀 무서운 사람 같아서." "서리가? 걔 완전 조용하고 착한 애로 소문났는데. 미팅 때도 되게 예의 바르고, 후배들한테도 잘해준다고 그랬어." "그게 소문이랑 다르다니까." 도윤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나조차도 며칠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으니까. "암튼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뭔 일 있으면 말해. 나 너 오래 봤잖아. 이런 적 없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경영학과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옆에 앉았다. 향으로 알았다. 은은하지만 분명한, 며칠 전 골목에서 스쳤던 그 향. 나는 몸이 먼저 굳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번호 받았어요." 서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특별한 억양도, 감정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알아요." "근데 왜 답장 안 해요?" "...할 말이 없어서요." "거짓말이잖아요. 무서워서 그런 거지." 정확했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시선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게 물리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 도망치는 사람 진짜 싫어해요." "그럼 안 도망치면요." 뜻하지 않게 그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입 밖으로 나가고서야 내가 뭘 말했는지 실감이 났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라고요?" "제가 안 도망치면 어쩔 건데요." 말을 뱉고 나서야 나는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깨달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대로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처음으로 진짜 웃었다. 조롱이 아니라, 뭔가 흥미로워하는 웃음이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눈이 살짝 접혔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재밌어졌네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벤치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럼 오늘 저녁에 시간 내요. 할 얘기 있으니까." 나는 대답할 틈도 없이, 그녀가 이미 등을 돌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여유로웠다. 마치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벤치의 딱딱한 나무 감촉이 등을 파고들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들이 전부 멀게 느껴졌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제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저녁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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