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3층 끝자락, 오래된 미술 도구들이 쌓여 있는 빈 교실은 해가 기울면서 창을 통해 스며드는 주황빛이 먼지 낀 공기 속을 부유하듯 흐르고 있었고, 낡은 이젤들 사이로 뻗어 나온 그 빛줄기가 바닥에 길게 누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윤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지우는 이미 창틀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평소라면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라도 흥얼거렸을 그녀가 오늘은 미동도 없이 창밖만 응시하고 있어서 그 정적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왔네." 지우가 짧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톤이 사라지고 없었고, 그 목소리가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노을빛만큼이나 서늘했다. 도윤은 문을 닫으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밑에서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아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할 얘기라는 게 뭔데." 도윤이 먼저 물었을 때, 지우는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침묵했다. 그 몇 초가 도윤에게는 몇 분처럼 느리게 흘렀고, 먼지 알갱이가 노을빛 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우는 다시 도윤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진짜 아무도 없어? 여자친구, 좋아하는 사람, 뭐든."
"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 도윤이 답답하다는 듯 되받았지만, 지우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대답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의 팔짱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럼 나는 뭔데." 그 질문이 던져진 순간, 교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창밖에서 들려오던 운동장의 함성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어?" 도윤이 되묻자 지우는 창틀에서 내려와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운동화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너한테 뭐냐고. 친구? 그냥 아는 사람? 아니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야?" 지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처음 본 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늘 눈웃음을 짓거나 입꼬리를 삐죽 올리는 게 익숙했던 그녀의 얼굴에, 지금은 도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소문 퍼지고 나서, 애들이 나한테 물어보더라. 강도윤 여자친구 너 아니냐고." 지우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었다.
"근데 나 그때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 아니라고, 나는 아니라고 그랬어." 지우가 잠시 숨을 삼켰다. "그 말 하는 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그 순간 지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도윤은 명치가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뭔가를 눈치챘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한테 다른 여자친구가 생긴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지우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도윤은 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창을 등지고 선 지우의 실루엣이 노을빛에 잠겨 윤곽만 남아 있었고, 그 뒷모습이 지금은 한없이 작아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우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도윤은 처음 겪었다.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언제나 여유롭고 당당하게 상황을 주도하던 그녀였고, 누군가 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오히려 그쪽을 다독여주는 게 지우의 자리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등을 돌린 채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은, 도윤이 알던 세계의 질서 하나가 조용히 무너지는 것 같은 감각을 안겨주었다.
"지우야." 도윤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지우는 재빨리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손끝에 아직 남아 있는 물기가 노을빛에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지우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이 조금 전까지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걸 도윤은 알 수 있었다.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는데, 눈은 여전히 붉었고, 그 부조화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녀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 그냥, 너한테 여자친구 생기면 지금처럼 못 놀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게 다야." 지우가 애써 가볍게 던진 그 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도윤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의 눈물이 단순한 친구 사이의 상실감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부족했지만, 지우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 보여 도윤도 차마 캐물을 수 없었다.
"이상하잖아, 지우야. 방금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런 얘기를……" 도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지우는 그 말을 자르듯 가방끈을 어깨에 걸쳤다.
"눈물은 무슨. 눈에 먼지 들어간 거야." 지우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말투에서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도윤은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아무튼, 소문은 확실히 아니라고 해줘. 알겠지?" 지우가 가방을 챙겨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던진 그 말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은 지우가 잠깐 멈춰 서서 등 뒤로 도윤을 향해 뭐라 더 말하려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교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도윤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방금 목격한 낯선 지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창으로 들어오던 노을빛은 어느새 더 붉게 물들어 있었고, 먼지 낀 교실 안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듯했다. 그것은 분명 우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표정이었고, 도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운 만큼이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명치를 가만히 눌러보았다. 여전히 뭔가에 짓눌린 듯한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도윤은 속으로 되물었다. 지우가 늘 자신에게 던지던 장난스러운 말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 손짓들, 그 모든 게 이제 와서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겁이 났고, 그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도윤이 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전혀 다른 방향에서 두 번째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