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략집 다 외웠는데 혐오라니

2화

눈을 떴을 때, 도훈은 낯선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하얀 석재로 된 천장이었다. 결이 곱게 다듬어진 돌, 은은하게 남은 채광창의 빛. 집이 아니었다. 뭐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도 없이 몸이 가볍게 움직였다. 방 안은 넓고 고풍스러웠다. 침대 옆에 놓인 옷장, 두꺼운 책이 쌓인 책상, 벽에 걸린 장식용 검. 바닥엔 짙은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영화 세트장 같았다. 도훈은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문질러 봤다. 질감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거 CG 아니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달랐다. 손가락이 더 길고, 손등에 익숙지 않은 흉터가 있었다. 손톱 모양도, 손목의 뼈 모양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뭐지, 이거. 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분명 자기가 움직이고 있는데, 그 손이 낯설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올라왔다. 근처에 있던 거울로 걸어갔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마저 낯설었다. 또각. 거울에 비친 얼굴은 도훈의 얼굴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낯이 익은데 정확히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한참을 들여다봤다. 눈꼬리 끝의 작은 흉터, 살짝 삐뚤어진 앞머리, 무심한 듯 날카로운 눈매. 순간 머리가 저릿했다. 지끈. 기억 하나가 밀려들었다. 중학교 시절, 몰래 플레이했던 미연시 게임. 야밤에 이불 속에서 휴대폰 화면 밝기를 최대한 낮추고 몰래 했던 그 게임. 제목이 떠올랐다. '청명학원의 달콤한 나날'. 그리고 이 얼굴. 설도훈. 조연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메인 남주의 친구, 아니 정확히는 학급의 문제아. 초반에 몇 번 등장해서 시비를 걸고, 중반부에 대충 사라지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캐릭터. 공략 대상도 아니고, 서브 주인공도 아니고. 그냥 배경 취급이었다. 미친. 도훈은 다시 거울을 봤다. 눈을 몇 번 깜빡여봤다. 거울 속 얼굴도 똑같이 눈을 깜빡였다. 확실했다. 설도훈의 얼굴이었다. 방 안을 뒤졌다. 옷장 서랍, 책상 서랍, 침대 밑까지 손을 넣어 뒤졌다. 서랍 속에서 낡은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겉면이 누렇게 바랬고, 접힌 자국이 여러 번 남아 있었다. 펼쳐보니 익숙한 필체였다. 할아버지의 필체. 설날마다 붓글씨를 쓰던 그 손, 그 획. "이 문을 넘어온 자에게. 이 세계는 우리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통로다. 사당지기의 핏줄만이 이 문을 열 수 있다. 돌아가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도훈은 편지를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사당지기. 할아버지가 그 사당을 지켰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평생 이유도 안 알려주고 매년 제사만 지내던 그 낡은 사당. 어릴 때 몇 번 따라갔다가 지루해서 몰래 도망쳤던 기억이 났다. 손이 떨렸다. 돌아가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이 쉽지. 편지에는 방법도, 힌트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게 있었다. 도훈은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했었다. 전체 루트, 전체 결말. 서린 루트, 하린 루트, 심지어 숨겨진 엔딩까지. 공략집도 없이 혼자 다 깨봤다. 그때는 그냥 시간이 많아서 그런 거였는데. 이 세계에서 벌어질 일들을, 도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거 완전 반칙 아니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곧 다시 굳었다. 반칙이든 아니든,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설도훈으로. 학급 최하위 평가에, 존재감도 없고, 결국엔 대충 퇴장하는 그 설도훈으로.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설도훈, 등원 준비 안 됐어?" 낯선 목소리였다. 하급생처럼 어린 톤이었다. 문 너머로 발을 동동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도훈은 급히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곧 나가." 대충 대답하고 옷장을 열었다. 안쪽에 옷걸이가 가득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 교복이 걸려 있었다. 청명 마법학원. 가슴팍에 문장이 새겨진 짙은 남색 재킷. 소매 끝에는 은실로 마감된 자수까지. 게임 오프닝에서 수백 번 본 그 교복이었다. 모니터 너머로 보던 것과 실물은 확실히 달랐다. 실제로 입어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재킷의 무게, 옷깃의 뻣뻣함, 어깨에 닿는 감촉까지 전부 낯설었다. 도훈은 옷을 갈아입으며 중얼거렸다. 설도훈이라는 캐릭터, 어떤 놈이었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불성실, 지각 상습, 과제 미제출, 반 친구들과 시비. 그리고 한서린에게 찍혀서 계속 갈리는 역할. 매 화마다 한 번씩 등장해서 얻어맞고, 무시당하고, 결국 흐지부지 사라지는.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넥타이를 매다가 손이 멈췄다. 이 몸의 평판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감이 왔다. 학원 안에서 인사이드 아웃급으로 미운털 박힌 위치. 하지만. 도훈은 거울 속 자신을 다시 봤다. 넥타이를 마저 고쳐 맸다. 이 몸이 어떤 평가를 받았든, 지금부터는 내가 움직이는 거다. 설정값은 설정값이고, 내가 아는 미래는 내가 아는 미래다.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서린 루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린 루트에서 무슨 사건이 터지는지, 숨겨진 엔딩을 보려면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 전부 머릿속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가 문제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는 학생들로 붐볐다. 마법 지팡이를 든 애들, 로브를 걸친 애들,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드는 애들. 다들 도훈을 스쳐 지나가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기 또 왔다." 누군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늘도 지각이래." 옆에 있던 애가 코웃음을 쳤다. 그 시선들, 그 말투에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도훈은 그 시선들을 그대로 받으며 걸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익숙해질 시간도 없이 익숙해져야 하는 상황이라니. 정문 너머로 거대한 첨탑이 보였다. 청명 마법학원 본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흰 석조 건물, 그 주위를 감싼 넝쿨과 오래된 나무들. 게임 화면에서만 보던 배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무 사이로 마법등의 불빛이 흔들렸다. 장관이긴 한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게임 지식은 있고, 몸은 최악의 평판을 가진 조연이고, 돌아갈 방법은 아무것도 모르고. 도훈은 첨탑을 올려다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살아남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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