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후작가 숨은 천재 마법사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손의 크기였다. 손가락이 너무 짧고, 손등의 살이 유난히 투명해서 핏줄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는데, 나는 그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펴보면서도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손톱 끝이 너무 매끈했고, 손목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조차 낯설었으며, 이불을 밀어내려는 순간에도 팔이 마음처럼 뻗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분명히 어제까지 나는 서른둘의 대한민국 회사원이었고, 야근을 마치고 택시 대신 도보로 귀가하다가 신호를 무시한 트럭에 치였다는 것까지는 또렷이 기억나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낯선 방의 화려한 천장 몰딩과,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낯선 소녀의 얼굴이었다. 방은 넓었다. 벽에는 금박을 두른 액자들이 걸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정원수가 다듬어진 흔적이 보였는데, 그 모든 게 내가 살던 열두 평 원룸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풍경이어서, 나는 순간 이게 죽고 난 뒤에 받는 어떤 보상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물론 그런 낭만적인 상상은 몇 초도 못 갔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하고 그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려서 마치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떨림의 정도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그제야 이 몸의 주인이 평소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게 꿈인지 뭔지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머릿속으로 정보가, 마치 오래된 하드디스크가 갑자기 인식되기라도 한 것처럼,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정확히는 전생의 내가 퇴근길에 하던 유일한 취미, 모바일 게임에 대한 기억이었는데, 그 게임 속에서 '이서한'이라는 이름의 조연 악역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지금 이 몸이 바로 그 이서한이라는 사실이, 마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한꺼번에 정리되어 떠올랐다. 진홍 후작가의 소공자, 다섯 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성격이 뒤틀린 채로 열다섯 살쯔음에 학원에 입학하고, 주인공 유진혁을 온갖 방식으로 괴롭히다가 결국 중반부 결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해 마력을 봉인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그런 캐릭터였다. 기억의 파편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서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장면들, 유진혁의 물건을 부수는 장면, 학원 복도에서 하급생을 붙잡고 마력을 과시하듯 위협하는 장면, 그리고 결전 장면에서 무릎을 꿇은 채 마력을 강제로 봉인당하는 그 마지막 장면까지, 게임 속 짧은 컷신들이 순서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저 입장에서는 그냥 '아, 저 새끼 또 나왔네' 하고 넘기던 조연이었는데, 그 조연의 몸에 지금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실감이 안 났다. '미친...'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남의 인생에 얹혀사는 것도 억울한데 하필 그 인생의 결말이 감옥살이라니, 이건 로또에 당첨됐다고 좋아했다가 알고 보니 세금 고지서였다는 걸 깨닫는 기분과 비슷했다. 아니, 정확히는 세금 고지서에 벌금까지 붙어 있는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잠시 숨을 골랐는데, 다섯 살짜리 폐가 이렇게까지 얕은 숨을 쉬는 줄은 몰랐어서 그 감각 하나만으로도 현실감이 확 밀려들었다.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폭이 손바닥만 했고, 그게 너무 작아서 오히려 우스웠다. "도련님?" 하고 소녀가 다시 불렀다. 나는 그제야 이 아이의 이름이 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저택의 시녀들 중 유일하게 내 방 담당으로 배치된 아이라는 것을, 원작 게임의 텍스트 로그에서 스치듯 본 기억을 통해 떠올렸다.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던 건, 이 시녀가 앞으로 오랫동안 내 손에 시달릴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는데, 원작에서의 이서한은 이 아이를 감정 배출구로 썼다는 서술이 있었으니까. 구체적으로는 물건을 집어던지고, 트집을 잡아 벌을 세우고, 심지어는 뺨까지 때리는 장면이 짧게 언급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몇 줄짜리 서술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떨리는 목소리의 근거였다는 걸 깨닫자 속이 조금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는 이서한이 되어야 했고, 동시에 이서한이어서는 안 됐다. 정확히는, 진홍 후작가 소공자라는 신분은 유지해야 했지만 그 성격만은 갈아치워야 했다는 뜻이었다. 파멸 엔딩을 피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하나는 유진혁과 원한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작에서 서술조차 되지 않았던 이서한의 진짜 마력, 그러니까 후작가 혈통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재능을 어떻게든 확인하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 중 하나만 해서는 부족했다. 원한을 안 만들어도 마력이 형편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다른 방식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었고, 마력만 키워도 성격이 지금 그대로라면 언젠가는 유진혁과 부딫히게 될 게 뻔했으니까. "소이야" 하고 나는 다섯 살짜리 목소리로 처음 그 이름을 불러봤는데, 발음이 어설퍼서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름이 소이 맞지?" 소녀는 그 질문에 눈을 크게 떴다. 아마 평소 이서한이라면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나는 이 몸의 원래 성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소이는 잠깐 대답을 못 하고 입술만 몇 번 벙긋거리다가, 그제야 겨우 "예, 예... 소이입니다, 도련님" 하고 대답했는데, 그 목소리에 섞인 당혹감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나도 회사에서 갑자기 상사가 친절하게 이름을 물어보면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 같았다. 이후 며칠간 저택을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다섯 살짜리 소공자는 이미 하인들에게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게 일상이었다는 모양이었고, 나는 그 흔적들, 깨진 도자기 조각이나 벽에 남은 흠집 같은 것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사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복도 한쪽 벽에는 화병이 부딛혔던 자국이 그대로 움푹 남아 있었고, 응접실 문틀에는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그은 듯한 흠집이 몇 줄 있었는데, 그걸 발견했을 때는 정말로 다섯 살짜리 몸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게 믹기지가 않아서 헛웃음만 나왔다. '이 조그만 팔로 이런 것까지 했다고?' 하는 감탄과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다. 부모는 기대할 게 없었다. 아버지 이강호는 왕국의 고위 관료였는데, 저택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벌이는 뒷거래에 쓰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나를 마주쳐도 그저 '혈통을 이어야 할 도구' 정도로 취급했다.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아버지가 저택에 머무는 시간은 하루에 채 한 시간도 안 됐고, 그마저도 서재에 틀어박혀 누군가와 서신을 주고받는 데 썼다. 어머니 윤채경은 그보다 더했는데, 연회 초청장과 보석 목록을 뒤적이는 데는 열정적이었지만 자기 아들의 눈동자 색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어느 날 응접실에서 마주쳤을 때, 어머니는 나를 보며 잠깐 시선을 멈추더니 "눈이... 원래 저런 색이었나" 하고 시녀에게 묻는 걸 들었는데, 그 순간의 허탈함은 말로 설명하기가 좀 애매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나는 그저 '후작가의 씨'였을 뿐,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집사 박관수는 조금 달랐다. 처음엔 갑자기 얌전해진 다섯 살 소공자를 보고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살펴봤는데, 하루는 내 이마에 손을 대보기까지 했다. 열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계속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던 그 시선이 오히려 나에게는 위안이 됐다. 최소한 이 저택에서 나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부모조차 눈동자 색을 헷갈리는 집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내 상태 변화를 눈치챈다는 게 생각보다 큰 의미였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 게임의 다음 전개를 최대한 복기해보려 애썼다. 입학은 열다섯 살에, 유진혁과의 결전은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정작 이서한의 마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게임 안에서도 명확히 서술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저 '숨겨진 재능'이라는 클리셰적인 서술 한 줄만 있었을 뿐이었다. 유저 커뮤니티에서도 이서한의 마력에 대해서는 딱히 논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서술 비중이 적었다는 뜻이기도 했고, 반대로 말하면 아직 아무에게도 검증되지 않은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 숨겨진 재능이라는 걸, 내가 직접 파봐야겠다는 거잖아.' 다섯 살짜리 몸으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마법을, 홀로. 그게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 계획을 실행할 방법이 막막하다는 거였다. 다섯 살짜리에게 마법 교사를 붙여줄 부모도 아니었고, 서재에 몰래 들어가 마법서를 뒤적일 체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 조그만 몸으로 뭘 어떻게 시도해야 마력이라는 게 반응이라도 하는지조차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봤는데,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뜨거운 것도, 저린 것도, 아무것도. 그저 다섯 살짜리 손가락이 이불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저택은 여전히 낯설었고, 내일부터 시작될 하루하루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몸으로 살아남으려면, 지금까지 이서한이 해온 모든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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