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스터디룸의 불빛을 끄고 나서던 저녁, 형광등 아래 켜켜이 쌓여 있던 문제집 냄새와 커피 냄새가 옷깃에 배어 있는 것을 느끼며 도현은 은서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느릿느릿 내려오는 동안 그는 며칠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눌러 담아뒀던 질문을 이제는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끝으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문 끝에, 도현은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뭔데, 편하게 물어봐."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하자, 도현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반 애들이 나더러 여자 꼬시는 놈이라고 하던데. 그게 왜 나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 말에 은서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거. 걔들 진짜 웃기지 않아? 자기들이 관심 있어서 다가온 걸 왜 남 탓을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먼저 말 걸었잖아, 그날 배달 왔을 때부터. 근데 걔들 눈엔 그게 네가 나한테 들이댄 것처럼 보였나 보지. 원래 그런 애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인정하는 게 제일 무섭거든."
그녀의 대답에 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다가간 적은 없었는데.' 곱씹을수록 억울함보다 씁쓸함이 명치 아래로 가라앉았다. 언제나 여자애들의 호의 앞에서 그는 수동적으로 응했을 뿐이었고, 오히려 그 호의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반 남학생들의 눈에는 그가 먼저 여자들을 유혹한 것처럼 비쳤다는 사실이,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씌워놓은 옷처럼 그를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냥…… 배달 온 것뿐이었는데."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오는 그 말에, 은서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억울해할 거 없어. 걔들이 지레짐작으로 만든 오해야. 네가 뭘 잘못한 게 아니라."
그 말이 위로가 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도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둘이 함께 올라타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서윤이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숨을 살짝 몰아쉬며 옷매를 정리하던 서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그렇게 재밌게 해?"
냉소적으로 묻는 그 말에 은서가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주자, 서윤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현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과거?"
그 짧은 되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도현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서윤이 팔짱을 낀 채 덧붙였다.
"네 과거 말이야. 그런 오해받으면서도 왜 아무 말 안 하고 다녔어.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을 하지, 왜 그렇게 다 참고 살아."
"딱히 해명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믿잖아."
서윤의 무심한 한마디가 오히려 도현의 가슴 한켠을 콕 찔렀다. 별다른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는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세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짧은 정적이 흐르는 사이, 층수 표시등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1층에 도착해 함께 걸어 나가는 길, 마침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채린이 그들을 보고 손을 살짝 들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만지던 그녀는 세 사람이 다가오자 별일 아니라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얘기 다 끝났어?"
"응, 근데 채린이 넌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은서가 묻자, 채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할 얘기 있어서. 도현이한테."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채린에게로 쏠렸고, 채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도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를 얹었다.
"너, 유준이랑 예전부터 아는 사이 아니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감각이 들었다. 목이 순간적으로 조여드는 느낌과 함께,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걔랑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던 것뿐인데."
"그래?"
채린이 짧게 되묻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그 눈빛 속에는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서늘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은서와 서윤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그 자리에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도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고쳐 메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손바닥에 배어난 땀이 그의 동요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밤,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현은 문득 유준과의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학급비 미납자를 칠판에 이름 적어 발표하던 그날, 유준이 자기 옆자리였던 도현의 이름이 적히는 걸 보고 큰 소리로 웃었던 장면이었다. 그때 반 아이들 몇몇이 따라 웃던 소리, 칠판 분필 가루가 허공에 부옇게 흩어지던 풍경, 그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던 그 순간의 열기까지도 이상하게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때부터였나.'
지금 이 모든 적대감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면서도, 그는 애써 그 기억을 밀어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더 서늘한 것은 마음속에서 좀처럼 가시지 않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채린의 질문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다는 것을, 도현은 알 수 없는 확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액정 불빛이 어두운 골목을 잠깐 밝히는 사이, 도현은 그 문장을 읽고 그대로 걸음을 멈춰 섰다.
"내일 학교 끝나고 옥상으로 와. 안 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발신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도현은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유준의 그림자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휴대폰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채린이 던진 질문과 이 문자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