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급식실을 빠져나오던 순간 채린과 마주쳤던 그 서늘한 눈빛이 아직도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도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복도를 가로질러 교실로 돌아갔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오후의 볕이 책상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 빛의 결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에도 채린의 시선이 자꾸만 떠올라서, 도현은 몇 번이나 손끝으로 펜을 돌리며 애먼 곳에 신경을 흩뜨렸다. 남은 오후 수업 내내 선생님의 목소리는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소음처럼 흐릿하게 들렸고, 창밖의 볕만 우두커니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낸 그는 종례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방을 챙겨 뛰쳐나가려던 그의 앞을, 유준을 중심으로 몰려선 남학생 서넛이 가로막았다. 교실 뒷문 근처에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자세만 봐도 미리 짜고 온 것이 분명했다. "야, 이도현. 잠깐 얘기 좀 하자." 유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고, 도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마지못해 빈 교실로 끌려갔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는 빈 교실에서, 유준이 책상에 걸터앉으며 다리를 흔들었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반 친목회비. 다들 삼만 원씩 걷었는데 너만 안 냈더라?" "그런 거 있는지도 몰랐는데." 도현이 낮게 대답하자,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몰랐다니까 봐줘야 되나. 배달 뛰면서 번 돈 좀 있잖아, 안 그래?" 다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거들었다. "요즘 걔 오토바이 소리 나면 다들 알아본대. 존나 유명인이던데?" 낮게 깔린 비웃음이 이어졌다.
그 말에 도현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명치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받쳐 올라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삼켰다. '어차피 말해봐야 소용없다.' 삼만 원. 누군가에게는 웃으며 낼 수 있는 돈이지만, 도현에게는 배달 두 시간의 값이었고, 서아의 저녁 반찬값이기도 했다. 그 셈을 이 자리에서 입 밖에 낼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그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침묵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이 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구두 굽이 타일 바닥에 닿는 소리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도현의 심장이 조금씩 오그라들었다. "싫으면 안 내도 돼. 그냥 앞으로 반에서 좀 조용히 지내라고, 그게 서로 편하지 않겠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협처럼 공기를 짓눌렀다.
그 순간, 교실 문이 벌컥 열리며 밝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건데, 다들?" 은서였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선 그녀는 상황을 한눈에 훑어보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그녀의 눈빛만은 또렷하게 날이 서 있었다. "친목회비 걷는다며 왜 애 하나만 따로 불러다 겁을 줘? 그럼 나도 안 냈는데 나도 불러야지." "은서야, 이건 좀 다른 문제고—" 유준이 말을 흐리자, 은서가 성큼 다가와 도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깨가 스치는 거리였다. "다른 문제긴 뭐가 달라. 얘가 배달하는 거 부끄러운 일이야? 나는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또박또박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남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고, 유준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낭패감이 스쳤다가 금세 냉소로 덮였다. "별걸 다 편드네." 유준이 짧게 내뱉고는 무리를 이끌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갑자기 힘이 풀린 다리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은서가 그 앞에 쪽 쪼그려 앉으며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 있었는데, 그게 걱정인지 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괜찮아?" "……어, 고마워." 짧게 대답하는 도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은서는 대답 대신 씩 웃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 진짜 왜 그렇게까지 급하게 돈이 필요한 거야? 배달 그거 매일 하는 거 같던데."
순간 도현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대답을 고르는 사이 침묵이 길어졌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엉켰다. 은서는 더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챙겼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담에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알겠지?" 그녀가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가자, 도현은 텅 빈 교실에 홀로 남아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책가방 안쪽 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종이 두 장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여동생 서아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와, 책상 위에 붙여둔 대학 등록금 예상 견적표였다. 숫자로만 봐도 아득한 액수였는데, 그 위에 담임이 언급했던 국가장학금 기준―부양가족 인적공제를 받으려면 연간 소득이 백만 원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그 빌어먹을 조건이 겹쳐지자, 도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더 벌면 오히려 감점, 덜 벌면 생활이 안 되는 이 이상한 저울질 속에서 그는 매달 숨을 죽인 채 앱의 정산 내역을 확인해야 했다. 백구십몇만 원, 이백만 원을 넘기지 않으려 배달 시간을 조절해온 지난 몇 달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금이라도 초과하면 서아의 장학금이 날아가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이번 달 월세가 밀린다.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좁은 틈에서 그는 늘 숨을 죽인 채 살아왔다.
'누구한테 말해봐야 뭐가 달라져.' 그렇게 되뇌며 가방을 메고 일어선 순간,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리며 배달 콜이 떴다. 평소보다 두 배 가까운 배달비가 붙은 급한 콜이었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이 도착지 주소에서 멈췄다. 언덕 위 빌라촌―은서와 서윤, 채린이 사는 그 동네였다. 하필이면, 오늘 하루 사이 얼굴을 마주했던 세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겹쳐지는 그 골목으로 배달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도현의 손끝이 순간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