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낯익은 걸음걸이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데는 며칠이 더 걸렸다.
며칠이라고 해봤자 마음 편히 흘려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밤마다 그 발소리를 복도에서 다시 들을까 봐 귀를 기울였고, 낮에는 미란이 가져오는 보고를 기다리느라 손끝이 저릿했다. 왕비 노릇을 하면서 이렇게 사람 하나의 발소리에 집착해본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래서 더 우스웠다. 남의 시녀 발소리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내가.
미란이 조심스럽게 알아본 결과, 그 시녀는 세리느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청림 백작가에서 데려왔다는 설명이었지만, 미란이 별궁 출입 명부를 조사해본 결과 그 이름은 원래 백작가 소속 명단에는 없었다.
"그럼 어디서 왔다는 거지."
"확인이 더 필요합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시녀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미 장미궁 안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발언권. 그 표현이 이상하게 들렸다. 시녀가 발언권을 가진다니. 보통은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시중드는 사람이 주인보다 목소리가 크다는 건, 뭔가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어떤 발언권."
"영애의 식사나 접견을 그 시녀가 조율한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방문하시는 시간도 그 시녀가 알려준다는 얘기가 있고요."
방문 시간을 알려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시녀가 왕의 동선까지 관리한다니. 이건 시중을 드는 게 아니라, 뭔가를 조율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병약한 손님을 보살피는 시녀가 그 정도 권한을 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사람 곁에는 원래 그런 사람이 하나쯤 붙는 법이니까. 하지만 뭔가, 그림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세리느라는 이름이 명부에 없다는 것부터, 이미 어긋나 있었다.
"계속 알아봐줘. 그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예, 왕비님."
미란이 물러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정원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는데, 마음은 그 반대였다.
그날 오후, 나는 지환 왕자의 방문을 받았다. 열일곱의 도헌의 동생은, 형과 달리 표정이 밝고 말이 많은 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웃고 있었다. 그 웃음만 봐도 하루가 조금 덜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형수님, 요즘 안색이 안 좋으세요."
"그런가."
나는 손으로 뺨을 슬쩍 문질렀다. 안색이 안 좋다는 말을 듣기 전엔 몰랐는데, 듣고 나니 갑자기 얼굴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형 때문이죠?"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열일곱짜리가 이렇게 눈치가 빠를 일인가.
"어떻게 알았어."
"뻔하죠. 형이 요즘 이상하게 그 영애분한테 신경을 쓰니까요. 사실 형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인데."
지환이 어깨를 으쓱했다. 의자에 편하게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형은 원래 남한테 관심 잘 안 줘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누가 아파도, 누가 힘들다고 해도, 그냥 '그런가'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딱 하나, 몸이 피곤하면 항상 꿀 탄 홍차를 찾았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부터요. 그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형수님이 시작하신 그 홍차 의식을 그렇게 좋아했던 거예요."
피로할 때 꿀 탄 홍차라니. 새로운 정보였다. 도헌이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지금까지 몰랐다. 십 년을 부부로 지냈는데도.
"그런 얘기, 형한테 들은 거야?"
"아뇨, 어머니 시녀였던 분한테 들었어요. 형은 그런 얘기 잘 안 하거든요. 자기 얘기는."
그렇겠지. 도헌은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명령하고, 확인하고,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홍차 한 잔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가, 죽은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요즘 형, 낮 동안에 유난히 피곤해 보여요. 밤에도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고요."
"왜 그럴까."
"저도 모르죠. 근데 확실한 건, 그런 상태일 때 형은 원래 형수님 홍차 아니면 안 마셨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아예 안 마시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도헌이 요즘 유난히 피곤해 보인다는 것, 그런데 홍차는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습관을 버렸다는 건, 뭔가 다른 게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지환, 혹시 형이 요즘 무슨 일로 신경 쓰는 게 있는지 알아?"
지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면서.
"저한테는 별말 없어요. 형이 저한테 속내 얘기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근데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대신들 중에 몇 명이 요즘 형한테 자주 드나든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뭔가 청림 백작가 쪽 일로."
청림 백작가.
백설아의 가문. 국정과 직결된다고 도헌이 말했던 그 가문.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그 말의 무게가 달라졌다.
"대신들이 왜 그 가문 일로 형한테 드나들어?"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정치 얘기는 저까지 안 내려와서."
지환이 웃으며 답했지만, 그 웃음이 조금 어색했다. 알면서도 말 안 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뭔가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해졌다. 단순히 병약한 영애를 배려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뭔가 더 있다는 느낌. 홍차를 끊은 것도, 대신들이 드나드는 것도, 세리느라는 시녀가 발언권을 가진 것도,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 실 같았다.
지환이 돌아간 뒤, 나는 미란을 불렀다.
"청림 백작가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줘."
미란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청림 백작가는 원래 국경 지역의 유력 가문입니다. 몇 년 전부터 재정이 어렵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조정 내 몇몇 대신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누구랑."
"확실하진 않지만, 우형준 대감 쪽과 연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형준. 그 이름을 듣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왕권을 견제하려는 세력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도헌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재정이 어려운 가문이 왜 딸을 왕궁에 요양 보내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이미 뻔해서였다.
만약 백설아의 입궁이 단순한 요양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뒤에 우형준이 있다면. 이건 단순한 정략이 아니었다. 재정이 무너진 가문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은 거고, 그 방법의 중심에 도헌이 있는 거였다.
이건 이미 부부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나는 홍차 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오늘도 이 잔을, 도헌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오늘 밤에도 도헌은 그 방에 갈 것이다. 어제처럼, 그저께처럼, 아무 말 없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겠지.
그리고 나는, 이제 더는 그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뭔가를, 움직여야 했다.
미란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평소보다 급했다.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왕비님, 방금 소식이 왔습니다. 그 세리느라는 시녀가, 사실은 예전에 왕궁에서 일했던 인물이라는 겁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누구 밑에서."
미란이 대답을 망설이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이름을 짐작하고 있었다. 심장이 먼저 그 이름을 알아챈 것처럼, 손끝이 먼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