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십 년 전, 혼례식장에서 도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측실을 두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맹세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정략결혼치고는 참 근사한 대사였다. 청유국의 왕세자와 서해 왕국의 공주가 만나 식을 올리는 자리에서, 사랑도 아니고 애정도 아니고 겨우 그 한 마디였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의 약속이라도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진심인지 아닌지는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십 년 동안 그는 그 말을 지켰다.
흰 장미와 꿀 탄 홍차. 그게 우리의 방식이었다.
아침마다 흰 장미 한 송이가 내 방에 놓였고, 나는 밤마다 그가 마실 홍차에 꿀을 한 스푼 넣었다. 대단한 의식은 아니었다. 궁 안에 소문날 만큼 요란한 것도 아니고, 시녀들조차 무심히 지나칠 만큼 작은 일이었다. 그냥 그렇게, 매일 조금씩 서로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결혼 초에는 정치적 필요 때문에 맺어진 관계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청유국과 서해 왕국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결혼. 국경 지역의 곡물 교역권과 해군 기지 사용권, 그런 게 우리 혼사의 진짜 조건이었다. 사랑 같은 건 나중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계산에 들어있지도 않았던 문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그 작은 것들에 의미를 두게 됐다. 흰 장미가 늦게 오면 신경이 쓰였고, 그가 홍차를 마다하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됐다. 하다못해 꽃잎이 살짝 시든 것만 봐도 정원사를 불러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어졌으니까.
그게 부부라는 거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았다.
오늘 아침 흰 장미가 빠졌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그 십 년의 시간을 다시 돌이켜보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고 넘기려 했는데, 자꾸 그 자리, 화병이 텅 비어 있던 그 자리가 눈에 밟혔다.
"왕비님." 미란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폐하께서 오늘도 장미궁에 가셨다고 합니다."
"또?"
"이틀째입니다."
나는 자수를 놓던 손을 멈췄다. 바늘이 손끝을 살짝 찔렀지만 아프지 않았다. 아픈 건 다른 데였다.
"영애의 건강이 많이 안 좋은가?"
"의원의 진단으로는, 폐병 초기라고 합니다. 서늘한 곳을 피하고 요양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문병을 가는 거고."
말투가 삐딱했다는 걸 나도 알았다. 미란은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이, 뭐랄까, "왕비님도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그 영애 이름이 뭐였지."
"청림 백작가의 영애입니다. 이름은 백설아입니다."
"예쁜 이름이네."
"...왕비님."
"칭찬이야. 진심으로."
거짓말이었다. 진심 절반, 비꼼 절반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산책 삼아 정원을 걷다가, 우연히 그쪽 회랑을 지나가게 됐다. 우연이라기엔 발걸음이 너무 정확히 그 방향으로 향했지만. 시녀들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말려봤자 들을 사람도 아니었고.
가을 정원은 국화 향이 짙었다. 평소라면 걸음을 멈추고 꽃을 구경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마음이 안 들었다. 발끝만 보고 걸었다.
장미궁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마침 문이 열리고 도헌이 나오고 있었다.
외투를 벗은 채였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폐하."
그가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표정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저 짧은 순간의 표정 관리, 십 년을 봐온 나는 안다. 뭔가 감추고 싶을 때 짓는 얼굴이다.
"서인."
"산책 중이었어요. 폐하는요?"
"영애께 문병을 다녀오는 길이다."
외투는 어디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요, 그분."
"폐가 약하다더군. 방에 냉기가 들면 안 된다고 해서, 잠시 벗어드렸을 뿐이다."
담담한 설명이었다. 이상할 것 없는 배려였다. 왕이 병약한 손님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것, 그게 뭐가 문제일까. 자비로운 군주, 백성을 아끼는 마음. 역사서에 적으면 아름다운 문장이 되겠지.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서늘한지 모르겠다.
"그렇군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어서 옷을 챙겨 입으세요. 감기라도 드시면 곤란하니까요."
"걱정할 필요 없다."
"제가 왕비인데 걱정을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뭔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그냥 짧게 웃었다.
"약한 사람을 돕는 건 왕의 자비다. 그대도 알지 않느냐."
왕의 자비. 그 말이 왜 이렇게 걸리는지. 십 년 전 그가 나한테 했던 맹세도 자비였을까. 아니면 계산이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알아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럴 때 웃는 게 제일 쉬웠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밤 홍차는 준비해둘게요."
"그래."
그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는 걸, 아니면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다. 반 박자 정도의 침묵.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자꾸 그 반 박자가 마음에 걸렸다.
돌아서서 걸으며, 나는 손끝으로 소매를 만졌다. 별거 아닌 대화였다. 별거 아닌 배려였다. 그런데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정원의 국화 향이 아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냥 내가 예민해진 거겠지.
미란이 뒤따라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왜 안 괜찮겠어."
"안색이 좀……"
"안색은 원래 이래. 걱정 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안색이야 원래 이랬으니까. 걱정되는 건 안색이 아니라 다른 거였지만, 그건 미란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평소처럼 홍차에 꿀을 넣었다. 스푼으로 정확히 한 번, 늘 그래왔던 대로. 찻물이 우러나는 향을 맡으며, 나는 애써 오늘 낮의 일을 머리에서 지웠다. 별거 아니었어. 정말 별거 아니었어.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가 방에 돌아왔을 때, 나는 찻잔을 내밀며 웃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영애의 상태가 안 좋아서 오래 있었다."
그는 찻잔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잠깐 냄새만 맡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어서."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표정했다. 늘 그렇듯. 그런데 그 무표정 안에 뭔가 낯선 게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 처음 보는 표정.
"그렇군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내려가서 쉬세요. 저도 이만 자야겠어요."
찻잔은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김이 서서히 식어가는 게 보였다.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웠던 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