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공인 이중 교제 중입니다

4화

주말, 서은과 함께 도착한 곳은 정말 저택이었다. 높은 담장, 넓은 정원, 나무마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가지. 대문 앞에서부터 숨이 턱 막혔다. "여기가 진짜 걔 집이야?" "응."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닌데." "적응해." 버스에서 내려 십 분을 걸어오는 동안에도 설마 했다. 골목이 점점 넓어지고, 담장이 점점 높아지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진짜였다. 대문 옆에 붙은 인터폰만 봐도 우리 집 현관문보다 비싸 보였다. 서은이 태연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딸랑, 맑은 소리가 안쪽에서 울렸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옷매무새를 두 번 정도 확인했다. 딱히 잘 보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이 저절로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손을 내렸다가, 다시 잡았다가, 결국 그냥 내렸다. 대문이 열리고,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계속 두리번거렸다. 한강고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잔디는 어디 선 하나 어긋난 데 없이 깎여 있었고, 화단에는 계절에 안 맞는 꽃까지 피어 있었다. 이거 다 사람이 관리하는 건가. 아니면 무슨 자동 시스템이라도 있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기 정원사만 따로 있는 거 아니야?" "있겠지." "…진짜?" "몰라, 안 물어봤어." 서은은 별로 신기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몇 번 와본 티가 났다. 현관 앞에 정하윤이 나와 있었다. 목발을 짚고 있었다. 다친 다리에 깁스가 얌전히 감겨 있었다. 첫인상은 통화 목소리 그대로, 조용하고 단정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넘겨서 이마가 다 보였다. 흰 셔츠에 카디건을 걸친 차림이 무슨 화보 찍으러 나온 사람 같았다.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이니 저런 것도 자연스러운 건가. "…안녕하세요." 인사가 먼저 나왔다. "안녕하세요." 하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오시는데 힘드셨죠." "아니요, 괜찮았어요." 말이 어색하게 겉돌았다. 서은이 옆에서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뭘 웃어." "안 웃었어." "입 실룩거리는 거 다 보이는데." 서은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저 표정, 뭔가 재미있어하는 얼굴인데 애써 감추는 게 더 티가 났다. 정원 안쪽, 나무 그늘 아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윤이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 자리로 향했다. 걸음마다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목발 끝이 잔디에 살짝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폭, 폭. 균일하지 않은 그 소리가 신경에 걸렸다. 앞서 걸어가는 서은은 아무렇지 않게 먼저 자리에 앉았지만,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하윤이 잠깐 멈췄다. "괜찮아요." "그래도." "…감사해요." 결국 팔을 살짝 잡았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였다. 목발을 짚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시선을 내리는 순간마다 속눈썹이 접히듯 내려앉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왜 이렇게 자세히 보고 있나 싶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방학 내내 이러고 계세요?" "거의요. 병원 갔다 오는 거 말고는 집에만 있어요."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해요."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이 왠지 씁쓸해 보였다. "그럼 하루 종일 뭐 하세요? 넷플릭스라도 보세요?" "그것도 벌써 다 봤어요. 이제 볼 게 없어요." "저희 학교 애들 얘기 궁금하지 않으세요? 웃긴 애들 많은데." 하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궁금해요." "성혜여고는 원래 어떤 곳이에요?" "조용한 곳이에요. 다들 예의 바르고, 규칙도 많고."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네, 좀 그래요." 하윤이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 서은이 반응했다. "봐, 웃잖아. 내가 뭐라 그랬어." "뭔데." "이 계획 필요하다고 했잖아." 하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서은이가 다 말했어요?" "네, 대충." "부담 안 되세요?" 또 그 질문이었다. 남을 먼저 걱정하는 버릇. "괜찮아요. 정말로." 이번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서 목발을 짚고 조심스럽게 걷는 사람을 두고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조용한 마당에 새소리만 간간이 섞였다. 멀리서 가정부인지 누군가 물 주는 소리가 들렸다. 촤아, 규칙적인 물줄기 소리. 이 집은 소리마저 정돈된 느낌이었다. 우리 집 마당이었다면 옆집 강아지 짖는 소리라도 섞였을 텐데. "그럼 앞으로 뭘 하면 되는 거예요?" 하윤이 물었다. "일단 문자 주고받고, 가끔 통화하고, 시간 되면 이렇게 만나면 돼요." 서은이 대신 대답했다. "…괜찮을까요, 그렇게." "괜찮아요." 대답을 하면서, 나도 스스로 조금 놀랐다. 원래 이런 일에는 신중하게 세 번은 따져 물어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인데, 지금은 별로 따지지 않고 있었다. "근데 왜 이런 걸 부탁해요?" 물어보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윤의 손끝이 테이블 위에서 살짝 굳었다. "…그냥, 필요해서요." 더 묻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서은도 슬쩍 화제를 돌렸다. "우리 태오가 연기는 좀 하는 편이에요. 걱정 마세요." "연기는 무슨." "방금도 잘했잖아, 걱정 안 되는 척." "그게 연긴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하윤이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은이 옆에서 팔짱을 꼈다. "봤지, 착하지." "팔짱은 왜 껴." "공식 커플이니까." "공식 커플이 팔짱까지 껴야 되냐." "몰라, 그냥 끼고 싶어서." 말이 안 되는 이유였지만,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방금 만난 사람 얼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목발을 짚고 걷는 조심스러운 걸음, 속눈썹이 접히는 순간, 씁쓸하게 웃던 표정까지. "근데 태오야." "뭐." "하윤이 앞에서는 좀 더 잘해줘." "왜." "걘 좀 다르니까." "뭐가 다른데." 서은이 대답을 살짝 미뤘다. 뭔가 말하려다가 삼키는 얼굴이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서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쩐지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답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밤, 휴대폰에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오늘 감사했어요. 다음에 또 놀아주세요. 짧은 문장 하나에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답장을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 좋아요, 언제든 불러주세요. — 지움. 저도 오늘 즐거웠어요. — 지움. 다음엔 어디 갈까요? — 이것도 지움.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문자 하나에 이렇게 오래 걸린 적이 없는데. 결국 짧게 하나 보냈다. 좋아요, 또 갈게요. 보내고 나서야 손끝이 뜨끈했다. 뭔가 시작된 기분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휴대폰 화면이 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서은이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걘 좀 다르니까. 다르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 다친 다리 말고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