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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체육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농구부 훈련이 끝난 직후였다.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으려던 참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태오." 한서은이었다. 같은 반이지만 말을 섞은 적은 거의 없었다. 전학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지만, 이미 반에서 제일 유명한 애였다. 오른쪽 눈은 연한 검정, 왼쪽 눈은 진한 갈색. 그 눈이 지금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처음 그 눈을 봤을 때가 생각났다. 첫 등교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순간. 애들이 다 숨을 멈췄던 것도 기억난다. 이색 눈동자라니, 소설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 눈이 정확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 "왜." 짧게 되물었다. "나랑 사귀자." 손끝이 순간 굳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물어야 하나, 그냥 못 들은 척해야 하나. 체육관 바닥에 튕기던 공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데, 이 상황은 그것보다 더 현실감이 없었다. "…뭐?" "사귀자고." 한서은이 팔짱을 낀 채 되풀이했다. 장난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주변에 아직 몇몇 부원들이 남아 있었다. 다들 못 들은 척했지만 등이 이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특히 부장 형은 아예 물병을 든 채로 동작을 멈춘 상태였다. 저러다 목 아플 텐데.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니야. 나 원래 이런 애야." 말이 되나, 저게. 말이 안 되는데 표정은 진지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저런 소리를 하니까 더 헷갈렸다. 이게 장난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거절할게." "왜?" "이유가 없잖아." "이유는 만들면 되지." 대화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원래 이런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작은 일도 세 번은 따져 물어야 마음이 놓이는 쪽이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 고를 때도 유통기한을 두 번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따질 틈도 없이 상황이 밀려들었다. "너 나 좋아해?" "아니." "그럼 왜 사귀재."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한서은이 씩 웃었다. 웃는 얼굴이 얄밉게 예뻤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꼬리 한쪽만 올라가는 그 웃음이,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싫어." "싫어도 사귈 거야." "그게 무슨 논리야." "내 논리." 말이 안 통했다. 체육관 안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숨이 조금 막혔다. 땀 냄새랑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유독 무겁게 가라앉았다. 부부장이라는 자리 때문에 늘 애들 앞에서 침착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부장이 워낙 감정적인 스타일이라, 내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무언의 룰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침착함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놀리는 거 아닌데." 서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장난기가 걷힌 자리에 뭔가 다른 게 스쳤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봤다. 그 짧은 순간, 눈동자 색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검정과 갈색, 서로 다른 두 색이 각자 다른 감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진심이야?" "응." "…왜 나야." "그건 진짜 나중에." "자꾸 나중에, 나중에. 지금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응. 지금은 없어." 너무 단호해서 오히려 화낼 타이밍을 놓쳤다. 손목시계 알람이 울렸다. 하필 이 타이밍에. 서은이 화면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바꿨다. 방금까지의 여유가 사라지고 조금 다급해 보였다. 손가락이 화면을 두 번 두드리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아니면 답장을 보내듯. "나 가봐야 돼. 근데 강태오." "뭐." "이거 하나만 알아둬. 나 혼자 하는 부탁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말해줄게." "야, 한서은."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서은이 가방을 챙기며 뒤돌았다. 뒷모습이 너무 멀쩍이 가벼워서 화가 났다. 방금 고백이라는 걸 던지고 간 사람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 걸치는 동작마저 여유로워 보여서 더 얄미웠다. 체육관 문이 다시 딸깍, 열리고 닫혔다. 정적이 잠깐 흘렀다. 남은 부원 하나가 슬쩍 다가왔다. "태오야, 방금 그거 뭐냐." "나도 몰라." "장난 아니지? 표정 완전 진지했는데." "몰라, 진짜." "와, 대박이다. 한서은이 너한테 대박이다." "조용히 좀 해." 진심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부로 내 조용한 학교생활은 끝났다는 것. 가방을 챙기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유니폼을 접는 순서도 두 번이나 헷갈렸다. 머릿속이 온통 방금 그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체육관을 나서면서도 문 앞에서 한 번 멈춰 섰다. 혹시 서은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감이 스쳤다. 말이 안 되는 기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꾸 그 말이 맴돌았다. 혼자 하는 부탁 아니야. 그럼 누구랑 같이. 부탁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걸렸다. 고백이라면서 부탁이라는 말을 쓰는 게 이상했다. 고백은 원래 그런 단어를 쓰는 게 아니잖아.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손끝을 꾹 눌렀다. 습관이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퍼즐 조각이 하나라도 안 맞으면 손끝으로 꾹꾹 누르면서 다시 맞춰보는 버릇. 오늘은 유독 그 버릇이 자주 나왔다. 편의점 앞을 지나면서도 눌렀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마저 서은의 손가락 두드리던 모습이랑 겹쳐 보였다. 이게 뭐야, 진짜. 집에 도착해서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자 하는 부탁이 아니라는 말. 그 말 뒤에 숨겨진 게 뭘까. 내일이면 알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벌써부터 초조했다. 이런 감정은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 더 신경이 쓰였다. 그날 밤, 나는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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