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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심장이 신호음 박자에 맞춰서 같이 뛰었다. 왜 내가 긴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서은이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걸 보니 더 긴장이 됐다. 딸깍. 상대가 받았다. "응, 서은아." 목소리가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말투 하나에서도 예의가 배어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데도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려질 정도였다. "하윤아, 나 지금 옆에 누구 있어." "누구?" "강태오라고, 우리 반 남자애." 순간 통화 저편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만 남았다. 숨소리도 조심스러웠다. 저 사람은 숨도 예의 있게 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은의 팔을 슬쩍 잡았다. "야, 이거 진짜 해야 돼?" "쉿." 서은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얘가 지금 나한테 쉿을 할 처지인가 싶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애?" "응. 걱정 마, 이상한 애 아니야." 이상한 애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나는 나 자신을 잘 아는데, 나도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근데 서은은 벌써 나에 대한 신원보증을 하고 있었다. 서은이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목소리가 크게 들려서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옥상 바람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흩어놓았다.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부터 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하윤의 목소리에 당황이 섞여 있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낯선 남자애 목소리가 들리는데 당황 안 할 사람이 어디 있나. 나였어도 전화 끊고 서은한테 전화 백 통은 다시 걸었을 거다. "서은아, 이게 무슨 상황이야."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침착한 사람도 당황하면 목소리 끝이 흔들리는구나. 그 흔들림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내가 설명할게. 잘 들어." 서은이 담담하게 상황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리를 다쳐서 요양 중인 것, 방학 내내 갇혀 있어야 하는 것, 심심하고 외로울 거라는 걱정, 그래서 재미있는 이벤트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것. 말하는 방식이 능숙했다. 마치 오래 연습한 대본 같았다. 나는 옆에서 듣고만 있는데도 손끝이 자꾸 옷깃을 매만졌다. 이 상황이 나한테도 어색한데 저쪽은 얼마나 더 어색할까. "이벤트가 뭔데." "태오랑 나, 공식 커플로 지낼 거야. 그리고 하윤이 너도, 태오랑 이차로 사귀는 척하는 거야." "…뭐?" 하윤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놀란 게 분명했다. 목소리 톤이 한 단계 올라가는 순간,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스피커 너머로 내 헛기침 소리까지 다 들릴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장난 아니고?" "장난 아니야. 여름방학 한 달 동안만." "그건 좀…" "재밌을 거야. 매일 문자도 오고, 가끔 만나서 얘기도 하고." 서은은 세일즈맨처럼 말했다. 뭔가를 팔 때 쓰는 말투가 저런 건가 싶었다. 하윤이 저 말을 다 믿을까 걱정이 됐다. "근데 그분은 괜찮으신 거야?" 갑자기 나에게 질문이 넘어왔다. 순간 말을 골라야 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대답이 스쳐 지나갔다. 네, 완전 괜찮아요. 아니요, 사실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둘 다 틀린 대답 같았다. "…괜찮지 않은데 여기까지 왔어요." 정직하게 대답했다. 서은이 옆에서 눈을 부릅떴다. 눈을 저렇게 크게 뜨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채로 나를 노려봤다. "태오야." "사실이잖아."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어차피 스피커폰이라 그 속닥거림도 다 들렸을 텐데, 나중에야 그걸 깨달았다. 하윤이 잠깐 웃었다. 스피커 너머로 짧게 새어나온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짧았지만 맑았다. 웃을 때 목소리가 저렇게 다르구나 싶었다. 방금까지 당황했던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정직하시네요." "…네." "저는 괜찮아요. 부담 주는 거면 안 해도 돼요." 의외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목소리였다. 그 배려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부담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정작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건 나였는데, 그 부담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괜찮아요, 안 부담스러워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이 나왔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나도 몰랐다. 입이 먼저 대답을 내놓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간 느낌이었다. 이게 맞나. 아니 근데 이미 말은 나갔고. 서은이 옆에서 씩 웃었다. 뭔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씩 웃는 저 표정이 왜 이렇게 얄미운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정확히 받아낸 사람의 미소였다. "그럼 저 이만 끊을게요. 일이 있어서요." 하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 그래. 이따 다시 얘기하자." 전화가 끊긴 뒤, 옥상에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만 남았다.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방학인데 이 옥상 위에서 나는 뭘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 "봤지? 걘 저런 애야. 남 부담 주는 거 제일 싫어해." "그러니까 더 이상해." "뭐가." "저런 애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필요로 해." 서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장난기로 가득했던 얼굴에 잠깐 균열이 생겼다. 아, 이 녀석도 진짜 표정이 있긴 하구나. 그 균열을 보고 나서야 이 상황이 그냥 장난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걔 원래 밝은 애 아니었어." "무슨 뜻이야." "이번 골절, 사실 별거 아닌 사고였는데, 그 뒤로 좀 많이 위축됐어. 집에만 있고, 사람도 잘 안 만나고." "왜." "몰라. 얘기 안 해줘." 서은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장난기 뒤에 숨겨져 있던 진짜 걱정이 슬쩍 드러났다. 나는 서은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늘 능글맞고 자신만만한 얼굴만 보다가, 저렇게 눈빛이 흐려지는 걸 보니 오히려 낯설었다. 얘도 걱정할 줄 아는 애였구나. "그래서 뭔가 확실한 걸 만들어주고 싶었어.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웃을 이유가 생기잖아." 말이 안 되는 이유였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남았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이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매일 웃을 이유가 생긴다니, 그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도는지 알 수 없었다. "…알겠어." "뭐?" "할게." 서은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눈빛이 순식간에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얼굴 표정 변화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진짜?" "딱 한 달. 그 이상은 안 해." "콜." 서은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려는 건지, 다짐을 받으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손을 잡았다. 손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장난기 가득한 애도 손은 긴장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손끝이 차가운 걸 느끼면서, 나는 이 애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태평한 애는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겁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손끝은 떨리는구나. "근데 태오야." "또 뭐." "이번 주말에 하윤이 집 갈 거야. 같이 가자." "…집?" "응. 저택." "저택이라니." 저택이라는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깐 되물었다. 이 동네에 저택이라고 부를 만한 집이 몇 채나 있나 하는 생각도 스쳤다. "가보면 알아." 서은이 씩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그 웃음 안에 뭔가 더 큰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옥상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었다. 뭔가 큰일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바람에 서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저 웃음 뒤에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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