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매점 앞 계단에 앉아 소희와 나란히 빵을 나눠 먹는 오후였다, 그런데 나는 빵의 맛을 하나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 자신조차 뒤늦게 깨달았다. 초코빵의 겉면이 손끝에 눌려 조금씩 부서졌고, 부스러기가 무릎 위로 떨어졌지만 나는 그것을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소희의 옆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는 내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오늘 학원 숙제가 너무 많다고 투덜거렸고, 나는 [힘들었겠다] 하고 대답하면서도 그 말이 얼마나 텅 빈 소리로 들릴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갔는데, 그 평소와 다르지 않음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목소리를 조율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한 달, 이라고 나는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편의점 골목에서 그 사진을 찍은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고, 그 며칠 동안 나는 이전과 똑같이 웃고 손을 잡고 하교를 함께 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 사진 폴더가 낮게 웅웅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밤마다 그 폴더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과, 절대 열어보지 말자는 다짐이 번갈아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날, 소희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액정에 잠깐 떠오른 알림창을 나는 우연히 보았는데, 발신인의 이름이 낯설었다. 저장된 이름이 그냥 [형]이었다는 게, 별거 아닌 척 넘어가려 해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이유였다. 형이라니. 소희에게 형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야?"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손끝이 조금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빵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서, 나는 그걸 감추려고 일부러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소희는 휴대폰을 화면이 아래로 향하게 뒤집으며 "아, 학원 오빠. 스터디 그룹 같이 하는 사람" 하고 대답했는데,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그대로 꺼내는 것처럼, 억양의 굴곡이 없었다.
한심했다, 이 정도의 거짓말에 마음이 이렇게 흔들리는 내 모습이. 그러나 나는 그 흔들림을 얼굴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래?] 하고 짧게 웃어넘겼고, 소희는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매점 유리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멀게 들렸고,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오직 소희의 숨소리만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손목을 잡는 척하며 소희의 소매를 슬쩍 걷어 올렸다. 지난번 편의점 골목에서 보았던 붉은 자국이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 있었는데, 소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며 "왜 그래" 하고 웃었지만 그 웃음 끝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소매 안쪽, 피부가 얇은 그 자리에 남은 자국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옅어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색으로 번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멍 든 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어, 넘어져서." 소희의 대답은 빠르고 매끄러웠지만, 그 매끄러움 자체가 이미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난주에도 비슷한 자국을 보았을 때 소희는 [문에 부딪혔다]고 했었다. 넘어졌다는 말과 부딪혔다는 말 사이의 거리를, 소희는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이제부터는 단순히 상처받은 채로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증거를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목격자로 남아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쪽으로 스스로를 바꿔야 한다고. 감정을 앞세워 소희를 몰아붙이는 순간, 소희는 더 깊이 숨어버릴 것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계단에서 일어나 교실로 돌아가는 길, 소희는 내 팔짱을 끼며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오늘 저녁 반찬이 뭐였는지, 담임이 또 무슨 잔소리를 했는지, 그런 사소한 말들 사이로 나는 계속해서 아까 본 [형]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소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 아래로 무언가가 조금씩 균열을 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오늘의 일을 적었다. [소희, 학원 오빠라는 존재. 손목 자국 여전함. 넘어졌다는 설명, 지난번과 다름.] 짧은 문장들이 화면 위에 쌓여갈 때마다, 가슴 한쪽이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문장을 하나씩 더 채워 넣었다. 날짜, 시간, 소희의 표정, 대답의 뉘앙스까지. 이렇게라도 붙잡아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이 모든 순간들이 흐릿하게 뭉개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버스 창문에 이마를 대고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세다가,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나는 소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그 물음에는 답이 없었고, 대신 창밖의 불빛들이 규칙적으로 명멸하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날 밤 열한 시쯤, 소희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니? 오늘 재밌었어 ㅎㅎ] 나는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나도] 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는데, 화면이 다시 밝아지며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똑같이 [형]이었고, 미리보기 창에는 [오늘 몇 시에 나올 수 있어] 라는 문장 일부가 잘려 보였다.
나는 그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켜서 확인했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머릿속은 점점 더 차갑고 명료해지고 있었다. 이건 학원 오빠가 아니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학원 오빠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렇게 다급한 말투로 [나올 수 있어] 같은 문장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몇 번이나 서성였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이 창틀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그 불빛 아래에서, 오늘 적어둔 메모를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형이라는 사람, 오늘 밤 소희를 불러낸 듯함. 확인 필요.]
문장을 적고 나자, 나는 문득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을까, 아니면 그냥 문자를 보내서 지금 어디 있냐고 물어볼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러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어 밤공기를 들이마셨는데,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들어차면서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엔 소희였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금방 올 거야] 라는 짧은 문장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에, 대체 어디를 나간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 [형]이라는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늘 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