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 없인 잠들 수 없어

3화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마다, 오늘 하루의 조각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것 같았다. 언니의 통보. 갑작스러운 이별. 짐을 챙겨 나온 방. 낯선 기숙사 복도의 냄새. 모든 것이 하루 만에 뒤집혔는데, 나는 그 사실을 실감할 겨를도 없이 그저 걷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그것뿐이었다. 물 한 잔이면 됐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2층으로 내려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아니라, 소리의 온도였다. 라운지 쪽에서 낮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타 소리였다. 처음엔 그저 누군가 틀어놓은 음악인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으니,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현이 떨리는 진동, 손끝이 프렛을 눌렀다가 미끄러지는 미세한 잡음, 숨소리처럼 섞여 드는 박자의 흔들림. 사람이, 직접, 연주하고 있었다. 서투른 연습곡이 아니었다. 코드를 짚는 손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이 곡을 수백 번은 쳐본 사람처럼, 손가락이 지판 위를 흐르듯 움직이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원래 목적지였던 정수기를 지나쳐 문 쪽으로 다가갔다. 라운지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손바닥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벌어진 틈으로, 스탠드 조명의 노란빛이 새어 나와 복도 바닥에 얇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선이 마치 누군가의 사적인 영역을 표시하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물을 마시러 나온 것뿐이었다. 소리 없이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나는 보고 말았다. 소파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은 짙은 색이었고, 끝이 층층이 잘린 울프컷이 목덜미를 덮지 않을 만큼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목덜미, 정확히는 귀 아래쪽에 작은 은색 피어싱 하나가 박혀 있었다. 스탠드 조명을 받아 그것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기타는 이미 연주가 끝났는지 소파 옆 바닥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손끝의 움직임이 멈춘 자리에서, 다른 종류의 접촉이 시작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얼굴을 알 수 없는 나조차도 한눈에 앳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동그랗고 순한 눈매, 아직 화장기가 남아 있지 않은 얼굴. 처음 보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뭔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고, 울프컷 머리를 한 사람의 손이 그 어깨를 부드럽게, 아주 익숙하게 감싸고 있었다. "떨지 마."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낮은 음역에, 끝을 살짝 늘어뜨리는 말투. "아무도 안 와." "그래도…"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작게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떡해." "봐도 상관없어." 상대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는 듯한,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이마가 맞닿았고, 곧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그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것을 넘어, 아예 멈춰버린 것 같았다. 손끝까지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저릿했다. 이상한 건, 내가 놀란 이유가 두 여자가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를 붙잡은 건 그 장면이 지나치게 자연스럽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런 밤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의 몸이 온전히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서로의 체온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느슨함. 문득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언니가 나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통보하듯 뱉었던 말들. 그리고 그 직후 걸려온 전화, 뚝 끊긴 목소리,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진 나. 나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갑자기 끝나버리는 것이었는데, 저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견고한 무언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낙차가, 나를 더 깊이 짓눌렀다. 나는 뒷걸음질쳤다. 발끝으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 뒤의 복도는 낯설고 어두웠다. 낮 동안 짐을 나르며 대충 훑어본 구조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벽을 짚으며 물러나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아마 복도 구석에 세워진 청소도구함의 모서리였을 것이다. 쿵. 낮지만 분명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라운지 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누구야." 낮은 목소리가 문 쪽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나른하게 늘어졌던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경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리는 명령을 듣지 않았다. 목구멍이 사포처럼 껄끄러워서, 아무 말도,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 맨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그 짧은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늘어졌다. 문이 벌컥 열렸다.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은, 문틈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훨씬 날카로웠다. 짙은 울프컷 아래로 날렵하게 뻗은 눈매, 왼쪽 눈썹 위에 작게 남은 흉터 자국, 입술 한쪽 끝에 박힌 은색 피어싱이 조명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키는 나보다 반 뼘쯤 컸고, 어깨는 가늘었지만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눈이 나를 정면으로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낯선 짐승의 정체를 가늠하는 사냥꾼의 시선 같았다. "너 뭐야."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경계와 적의가 서려 있었다. 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목에서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정작 몸은 그 어떤 반응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등 뒤에서 앳된 여학생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옷매를 급하게 정리하는 듯한 부스럭거림. "태은아, 누구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순진하게 떨리고 있었고, 조금 전 소파에서 보였던 대담함은 흔적도 없었다. 태은. 그게 저 사람의 이름이었다. "몰라." 태은이라 불린 사람이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걸음 하나에도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다 봤어?"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무너지듯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겪은 모든 일들─언니의 일방적인 통보, 갑작스러운 이별, 낯선 방, 짐 가방 하나로 시작된 새로운 생활,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가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짓눌렀다. 눈앞이 흔들리고, 발밑이 꺼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저는…"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갈라지고 작았다. "오늘 들어온 신입생이에요. 물 마시러 나왔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선이 다시 한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번에는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사냥꾼의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산하는 눈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 목격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가늠하는 냉정한 눈빛. "이름." 짧고 단정한 명령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 나는 그 한 마디에 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서아요." 태은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나는 셀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라운지 안쪽을 돌아보았다. 하늘이라 불린 여학생이 소파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옷매를 만지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당황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하늘아." 태은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먼저 방으로 가." "괜찮아?" 하늘이라 불린 여학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와 태은을 번갈아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나에 대한 경계심도 살짝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얘랑 얘기 좀 하고." 하늘은 잠시 머뭇거렸다. 나를 한 번 더 힐끗 쳐다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라운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계단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태은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이 완전히 사라지고, 복도에는 태은과 나 둘만 남았다. 스탠드 조명이 만들어내는 노란 그림자 속에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자세, 그 시선에는 우위를 확인하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놀랐지." 태은이 입을 열었다. 처음보다 훨씬 낮고 느긋한 어조였다. "근데 뭐, 이런 일로 놀라기엔, 여기 좀 익숙해져야 할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협박도, 사과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태연함이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사람처럼. "입 무거워?" 그녀가 물었다. "…네?" "봤잖아. 방금." 심장이 다시 갈비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췄다. "말 안 할게요." 겨우 그 말을 뱉어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요." 태은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더 훑어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웃음이, 안심시키려는 웃음인지 경고의 웃음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자." 태은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여유가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할지, 우리 좀 얘기해볼까."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