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곁에서만 무너진다

3화

"아, 이서도 있었네. 그냥 별거 아닌 얘기였어." 하은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으로 상황을 덮으려 했지만, 나는 그 웃음의 각도가 조금 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방금까지는 여유였고, 지금은 초조함이었다. 교실 뒤편, 사물함과 벽 사이 좁은 틈에서 셋이 모여 있던 자리였다. 하은과 그 옆의 두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대화를 뚝 끊었고, 그 끊긴 지점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무슨 얘기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소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교복 소매를 만지고 있었다. 그 손끝의 떨림이 눈에 들어왔다. "별거 아니면 나도 같이 들어도 되겠네." 나는 하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하은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 했다. "아니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모의고사 문제집 어디 파는지 물어본 거야." "문제집이라고?" "어, 문제집." "그런데 방금 답안지라고 했잖아." 하은의 표정이 아주 짧게 굳었다.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충분한 증거였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때 눈동자보다 먼저 턱 근육이 움직인다. 하은의 턱이 그랬다. "강이서, 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우리끼리 얘기하는 건데." "소민이한테 부당한 부탁 하는 거면 나랑 상관있는 얘기지." 나는 이 대화를 여기서 끝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당한 부탁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옆에 있던 두 아이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이런 무리는 항상 그렇다. 앞장서는 사람은 하나고, 나머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인다. "소민이 표정을 보면 알 것 같은데." 나는 소민 쪽을 흘깃 보며 말했다. 소민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 별걸 다 신경 쓰네." 하은은 결국 웃음으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그 웃음에는 이미 균열이 나 있었다. * 하은은 결국 그 자리를 피하듯 자기 무리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부류는 한번 거절당하면 방법을 바꿔서 다시 다가온다. 정면으로 안 되면 옆으로, 옆으로도 안 되면 아래로. 나는 소민을 데리고 조용한 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단은 늘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3층과 4층 사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빛이 먼지처럼 부서지는 그 자리에서, 소민은 계단 손잡이를 손으로 꾹 쥐고 있었다. "소민아, 진짜로 답안지 얘기였어?" 소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보고 학원에서 시험지 미리 받으면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알겠다고 했어." 나는 그 대답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답답함이 먼저 밀려왔다. 목 안쪽이 뻐근했다. "소민아. 그거 걸리면 너만 처벌받는 거 알아?" "알아." "아는데 왜 알겠다고 했어." "...안 하면 걔들이 나 싫어할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이 애의 문제가 단순히 낯을 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생존 방식이었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위험해지는 것도 감수하는. "소민아, 하나만 물어볼게. 걔들이 너 싫어하면, 그럼 너한테 뭐가 달라져?" 소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소민 혼자만 불안해질 뿐이다. "학교에서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소민은 한참 만에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그거보다 시험지 유출로 걸리는 게 훨씬 무서운 일이야. 알지?" "...알아." "아는데도 무서운 게 이긴 거네." 소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계단에서 소민의 어깨를 짧게 두드려주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굳어진 습관을 한 번의 대화로 바꿀 수는 없었다. 다만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 나는 그날 밤 오래 고민한 끝에, 다음 날 하은을 직접 찾아갔다. 소민이 없는 자리에서, 단둘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담임에게 말하는 건 소민에게 오히려 화살이 돌아갈 수 있었다. 소민 자신이 직접 거절하게 만드는 건, 아직 그럴 힘이 없었다. 결국 남는 방법은 하나였다. 하은이 스스로 겁을 먹게 만드는 것. 다음 날 아침, 하은이 혼자 매점 쪽으로 가는 걸 보고 뒤를 따라갔다. "하은아, 어제 그 얘기 계속하려고 했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하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뭐, 아직도 그거 신경 쓰여?" "응. 소민이한테 그런 부탁 다시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하은이 픽 웃었다. 웃음소리가 복도 벽에 얇게 부딧혔다가 사라졌다. "뭐 어떻게 되는데. 담임한테 말할 거야?" "담임한테 말하는 게 아니라, 학원 원장한테 말할 거야. 시험지 유출 시도가 어느 반, 몇 명 이름으로 얼마나 오갔는지." 하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눈꺼풀이 아주 짧게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그 학원, 원장이 너네 엄마 사촌이라고 자랑했었지. 그럼 학원 규정 위반이 그쪽 집안까지 문제되는 거 알지?" 나는 정확한 사실을 말한 게 아니었다. 그저 하은이 몇 주 전 자랑처럼 흘렸던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지금 이 순간 정확한 각도로 되돌려준 것뿐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자랑했던 것으로 위협받을 때 가장 크게 흔들린다. 자랑은 곧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이라는 뜻이니까.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하은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빠르게 새어 나갔다. "상관없으면 상관없는 거고, 상관있으면 상관있는 거지. 나는 그냥 사실만 말할 건데."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경고야. 다음은 없다는 경고." 하은은 잠시 나를 쏘아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먼저 피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아챈 것 같았다. "...나 그런 거 진짜로 안 할 거였어." 하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안 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런 부탁 하지도 말았어야지." "그건... 소민이가 어차피 알겠다고 했으니까." "누가 알겠다고 했다고 해서 그게 정당한 부탁이 되는 건 아니야. 그리고 소민이가 알겠다고 한 건, 무서워서 그런 거야. 너 그거 몰랐어?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야?" 하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하은의 얼굴 반쪽만 비추고 있었고, 그 그늘진 반쪽에서 뭔가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번만 더 그런 부탁하면, 나는 진짜로 학원에 말할 거야. 그리고 이건 내가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확인해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하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을 확인하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하은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이 대화의 승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그날 이후 하은 무리는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 소민에게 대놓고 부탁하는 일이 줄었고,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하은은 시선을 먼저 피했고, 예전처럼 소민 옆자리에 슬쩍 앉는 일도 없어졌다. 소민은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듯했지만, 나는 그 변화를 만든 사람으로서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지켜냈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오래 몸에 남았다. "이서야, 요즘 하은이 좀 조용해졌지?" 소민이 물었을 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응, 예전에는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어서." 소민은 정말로 이유를 모르는 얼굴이었다. 자기가 처했던 위험도, 그 위험이 사라진 이유도, 소민의 세계에서는 그저 조용한 날들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보는 소민이,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안심해도 되는 얼굴,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서포트 담당이라는 역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정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뒤흔들지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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