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곁에서만 무너진다

1화

봄이라고는 해도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창문을 열어두면 목덜미가 시릴 정도였는데, 그 냉기가 오히려 나는 좋았다. 뭔가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머리가 차가워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뜨거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급했고, 성급한 판단은 대체로 후회로 끝났다. 나는 후회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그 틈으로 들어오는 냉기를 얼굴에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사흘째, 담임은 조회가 끝난 뒤 나를 교무실로 따로 불렀다. 교무실 특유의 냄새—프린터 잉크와 미지근한 커피, 어딘가에서 타는 듯한 종이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담임의 책상 위에는 늘 그렇듯 서류가 쌓여 있었고, 그중 하나를 골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강이서,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담임은 서류철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시작했고, 나는 그게 부탁이 아니라 통보라는 걸 표지의 색깔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노란색 파일은 늘 상담부에서 내려오는 지원 대상자 서류였다. 나는 이미 그 색을 세 번쯤 봤었다. 매번 결말은 같았다. "전학생, 윤소민이라고. 공황장애가 있어서 학교 적응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데, 반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대." "제가요?" "네가 성실하잖니. 부반장이고." 나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실하다는 평가는 언제나 나에게 일을 더 얹는 방향으로만 쓰였다. 성실함. 참 편리한 단어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지울 때 쓰기 딱 좋은 명분이니까. 서포트 담당이라는 명목은 거창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다. 조퇴할 때 동행해주고, 필요하면 보건실에 데려가고, 담임에게 상태를 보고하는 것. 서류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고, 나는 그걸 다시 훑어보며 이 일이 얼마나 오래갈지 가늠해보았다. 한 학기? 아니면 일 년? 담임은 내 표정을 살피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옆에서 잘 봐주면 돼. 소민이가 워낙 조용한 애라서, 먼저 다가가기 힘들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서류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나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익숙했다. 다만 그 익숙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피곤해질 것 같았다. * 윤소민을 처음 본 건 그날 오후, 교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담임 옆에 서 있던 순간이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어깨가 안으로 말려 있어서 실제 체구보다 더 작아 보였다. 교복 재킷의 소매가 손목을 반쯤 덮을 정도로 길었는데, 그게 원래 그 애 사이즈인지 아니면 일부러 큰 걸 고른 건지 알 수 없었다.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 애에게 쏠렸는데도 그 애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어딘가에 두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윤소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가 작았다. 그리고 그 말을 하고 나서 그 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는데, 그 각도가 지나치게 정확해서 나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건 인사가 아니라 방어다. 몇몇 애들이 소민을 향해 작은 소리로 뭐라 속닥거렸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정도 거리에서 나는 목소리의 톤만으로도 그게 호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민의 어깨가 아주 살짝,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담임이 손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민을 내 옆자리로 안내했다. 그 애가 걸어오는 동안 나는 그 애의 눈이 계속 교실 이곳저곳을 스치듯 훑는 걸 보았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걸음걸이는 조용했고,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마치 이 교실 안에서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뒤에도 소민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린 채였다.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마치 언제든 다시 일어나 나가야 할 사람처럼. 손가락은 가방끈을 꽉 쥐고 있었고, 손등에 힘줄이 살짝 도드라져 보였다. "짐, 여기 내려놔도 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쪽 책상 모서리를 살짝 밀어주었다. 소민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조심스럽게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렸다.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그 조심스러움이 지나쳐서, 나는 그 애가 평소에도 이렇게 모든 행동을 조율하며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이름이 강이서야. 서포트 담당이라고 하는데, 그냥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네." 대답이 너무 빠르고 너무 순종적이었다. 뭘 물어도 저 애는 저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뭘 시켜도. 순종적인 대답. 그게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날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소민의 손끝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필기를 하는 손이 아니라 책상 아래 무릎 위에서 계속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뭔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니 정확히는 반 전체를 향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소민의 손끝이 옷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칠판에 분필 긋는 소리, 아이들의 웅성거림, 창밖에서 들리는 새소리. 평범한 교실의 소음들이었는데 소민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다 자극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 쉬는 시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민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걸 나는 못 본 척했다. 전학생이란 언제나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새로운 얼굴은 늘 관찰의 대상이 되고, 그 관찰은 대체로 호기심과 경계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런데 소민은 그 시선들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하나 다 느끼는 듯,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고 호흡이 조금씩 짧아지는 게 보였다. "괜찮아?" 나는 물었고, 소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너무 격렬해서, 나는 이게 긍정의 표시가 아니라 그저 반사적인 동작이라는 걸 알았다. 호흡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어깨가 위로 들썩였고,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했는데,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증상이었지만, 그 순간 뭔가 해야 한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주변 애들이 이상한 걸 눈치채고 하나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이 더 늘어나면, 소민의 상태가 더 나빠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소민아." 나는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이름을 불렀다. "숨 천천히 쉬어봐. 나 보고." 소민의 눈이 흔들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 담긴 건 두려움이었는데,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두려움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책상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시선을 끄는 소리, 나에게로 집중할 만한 소리. "하나, 둘, 셋. 나랑 같이 세볼래?" 어디서 배운 방법인지도 모르겠는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숨소리의 간격이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고, 소민은 그 소리에 놀란 듯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손끝의 힘이 조금 풀렸고, 옷자락에 새겨졌던 주름도 천천히 펴졌다. 괜찮은 척. 그게 저 애의 방식인가. 수업이 다시 시작되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우는 동안 나는 옆에 앉은 소민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흔들림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표정은 다시 무해하고 조용했다. 마치 방금 그 몇 분이 아예 없었던 일처럼. 나는 그 순간부터, 이 서포트라는 역할이 서류 한 장으로는 절대 설명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앞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질지는 그때의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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