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응접실로 가는 복도가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도 끝이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원래 이 정도 거리는 아니었을 텐데, 배가 고프면 공간 감각도 이상해지는 모양이다. 게임에서 캐릭터 체력 게이지가 바닥나면 화면이 흔들리는 그런 느낌이랄까. 물론 나한테는 리스폰 버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촛대 불빛이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 그림자가 나보다 마르고 길쭉했다. 실제로 보면 더 심할 거다. 요즘 거울을 잘 안 본다. 안 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사람이 자기 갈비뼈 개수를 눈으로 셀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날 밤은 잠이 잘 안 온다. 경험담이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화장대 앞에 섰다. 딱히 꾸미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리가 갑자기 힘이 풀려서 뭐라도 붙잡아야 했다. 손끝으로 화장대 모서리를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삼 년 전,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살짝 통통한 편이었다. 볼살도 있고, 팔뚝도 지금보다 두 배는 굵었다. 지금은 손목이 내 두 손가락으로 감기고도 남는다. 반지를 껴도 헐렁해서 자꾸 손가락 마디에서 겉돈다. 이게 정상적으로 자라는 열여덟 살 몸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성장기라는 단어가 나한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영양실조라는 단어를 이 세계에서 처음 배웠다. 병명치고는 참 담백하다. 굶는다는 뜻인데 이렇게 예쁘게 포장할 수가 있나. 의사도 아니고 그냥 이 저택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텐데, 마치 유행하는 다이어트 명칭처럼 들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영양실조. 캠핑 갈 때 챙기는 비상식량 한 봉지만 있어도 해결될 문제를 이 사람들은 삼 년째 방치하고 있었다.
하녀 하나가 방문을 두드렸다.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나한테 붙는 하녀는 늘 얼굴 없는 사람이다. 사흘이 멀다 하고 바뀌니 외울 필요도 없었다. 표정도 다 비슷했다. 나를 오래 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얼굴들.
"백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알아."
짧게 대답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걸음이 무거웠다. 배가 고프면 이상하게 다리부터 무거워진다. 뇌보다 다리가 먼저 항의하는 느낌이다.
문을 열자 아버지가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저 등판만 봐도 이미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인데 표정까지 봤으면 아예 응접실 문턱에서 멈췄을 거다.
"오늘 잘했다."
칭찬치고는 참 서늘했다. 온도가 없는 문장이었다. 마치 자판기에서 나온 음료처럼, 딱 필요한 만큼만 나오고 그 이상은 없는.
"혜린이가 무도회에서 얻은 동정심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청하 변경백가에서까지 소문이 들어갈 정도다."
청하 변경백가.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원작에서 이 가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남주 가문. 이서준이라는 인물의 배경. 삼류 소설 속 조연으로 스쳐 지나간 이름인데 이렇게 현실에서 다시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지금 내 상황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아버지의 다음 말이 그 의문을 지워줬다.
"곧 그쪽 후계자가 참석하는 자리가 있을 거다. 그때도 지금처럼 하도록 해라."
"거부하면요."
말이 튀어나온 순간 후회했다. 요즘 부쩍 입이 앞선다. 굶주림이 뇌를 좀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배가 고프면 겁도 없어지는 건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강해지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섰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계산기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숫자가 맞으면 통과, 안 맞으면 오류.
"거부하면 이번 주 식사는 없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배 속이 뒤틀렸다. 저녁 굶는 거는 익숙한데 일주일은 처음 듣는 형벌이었다.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하루 세 끼, 일주일이면 스물한 끼. 지금도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스물한 끼를 더 굶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잘 안 됐다. 아니, 상상은 되는데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답 말고 뭘 할 수 있었을까. 이 세계에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없다. 있어도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된다. 협상이라는 개념조차 사치스러웠다. 아버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종과 순종, 둘 중 하나였다.
방으로 돌아온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매트리스가 아니라 관에 눕는 기분이었다. 삼 년 동안 이런 날이 며칠이었는지 세는 것도 그만뒀다. 세다 보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배가 더 고파진다. 배고픔과 분노는 이상하게 같은 방향으로 굴러가는 감정이었다.
한숨을 쉬며 창문을 바라봤다. 밖은 아직 무도회의 여운이 남았는지 마차 소리가 들렸다. 귀족들이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 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오늘 밤 내가 뭘 먹었는지, 아니 안 먹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저택 안에서는 누구도 내 편이 아니다. 아버지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고, 혜린은 연출가고, 하녀들은 스쳐가는 사람들이다. 이 집 안에서 나는 그냥 소품이었다. 무대 위에 세워두고 필요할 때만 조명을 비추는 소품.
딱 한 사람 떠올랐다. 오유나.
삼 년 전, 이 몸에 처음 적응하던 시기에 유일하게 웃으며 다가와준 자작 영애였다. 그때는 진심으로 친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유나는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조금 달랐다.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재밌어서 말을 걸어온 사람 같았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손을 덥석 잡으며 웃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요즘은 연락이 뜸했지만, 아예 끊긴 건 아니었다. 가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짧은 편지가 오갔다. 안부를 묻는 정도의, 그렇게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그 정도의 끈이라도 절실했다.
종이를 꺼내 편지를 썼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엉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몇 번이나 잉크를 다시 묻혀야 했다. 손목에 힘이 없어서 펜을 쥐는 것조차 버거웠다.
'유나에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내일 정원에서 기다릴게.'
편지를 접으며 마지막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좀 유치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이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그 지푸라기가 얼마나 튼튼할지는 모르겠지만.
창밖 마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뜬 채로 누워 있었다. 천장 무늬를 세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몇 번이나 셌는지 기억도 안 났다.
배가 고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고픔보다 더 아픈 게 가슴 어딘가에 있었다. 정확히 어디인지 짚을 수는 없었지만, 그 통증은 배고픔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하게 뭉치는 느낌이었다.
내일 정원에서 유나를 만나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그것부터가 막막했다. 도와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 상황을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까. 어느 쪽도 자신이 없었다.
편지를 손에 쥔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창밖의 밤은 여전히 깊었고,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