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 불빛이 눈에 시리도록 밝았다.
와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현악 사중주, 향수 냄새가 뒤섞인 홀 한가운데서 나는 부채를 펼쳤다. 손이 떨렸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긴장해서 그런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일 거다. 아침부터 코르셋을 졌더니 위장이 존재감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그렇다고 여기서 배에서 소리가 나면 그건 또 다른 스캔들이 될 테니까.
이 몸에 들어온 지 벌써 삼 년째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인터넷 소설에서나 보던 '악녀 빙의'라는 걸 실제로 겪게 될 줄이야. 그것도 서브 남주는커녕 이름 한 줄 나오는 조연 악녀로. 원작 제목도 기억이 안 난다. 그때 나는 그냥 지하철에서 킬링타임용으로 넘겨 읽었을 뿐이니까. 이렇게 몸소 체험하게 될 줄 알았으면 등장인물 관계도라도 캡처해 뒀을 텐데.
"언니."
혜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낭랑하고, 다정하고, 사람 여럿을 홀리는 목소리. 나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 애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눈은 촉촉하고 입술은 살짝 떨리고. 완벽한 피해자 연기. 삼 년 동안 매번 다른 배경, 다른 상대로 이 짓을 반복하는데 표정에 티끌만큼도 지루한 기색이 없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나였으면 벌써 대본 외우다가 하품이라도 했을 텐데.
"저 영애가 저한테 못된 말을 했어요."
혜린이 가리킨 곳에는 처음 보는 백작 영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저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다. 안 봐도 안다. 이건 각본이다. 혜린이 쓰고, 내가 연기하고, 아버지가 감독하는. 대체 저 여자애는 몇 번째 희생양인지 세는 것도 관뒀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낯설었다. 차갑고 날이 서 있다. 삼 년을 연습하면 이 정도는 된다. 원작 소설을 웹으로 읽었을 때 나는 이 대사를 보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심지어 억양까지 완벽하다. 이 정도면 연기 학원 하나 차려도 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이 세계에는 연기 학원이 없다.
"저 애 얼굴 좀 봐라, 혜린아. 네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부채가 접히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영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해요, 정말로요. 마음속으로만 사과했다.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끝이다. 나 하나 흔들리면 저 애만 더 곤란해진다는 걸 삼 년 동안 배웠다. 동정은 사치고, 사치를 부리면 청산서가 날아온다.
"강 영애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웃음도 연기다. 실제로는 지금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와 있다. 이럴 때 폰 게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손가락 떨리는 걸 숨기려면 뭐라도 만지고 있어야 하는데 여긴 부채밖에 없다.
"왜 그러다니, 사실을 말해준 것뿐인데."
혜린이 눈물을 훔쳤다. 저 눈물, 진짜 짜다. 물기까지 완벽한 연기. 소금물 몇 방울 눈에 넣는 훈련이라도 받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느 날은 진짜로 몰래 소금물 챙기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언니, 저는 그저……"
"됐어. 그만해."
내가 말을 끊자 홀 안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 쏠렸다. 백 명이 넘는 눈동자가 나를 독약을 삼킨 사람처럼 쳐다봤다. 익숙하다. 이제는 익숙하다. 처음 이 자리에 섰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넘어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등만 곧게 세우면 된다는 걸 안다. 자세만 바르면 속은 아무리 떨어도 안 들킨다.
멀리, 홀 끝의 계단 위에서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도훈 백작. 표정이 없다. 저 사람은 늘 표정이 없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내면 차라리 사람 같은데, 저건 마치 감정 없는 관찰자 같았다. 무슨 자동판매기 같다고 해야 할까. 동전을 넣으면 정해진 상품이 나오는데, 나오는 상품이 늘 벌이라는 게 문제지만.
입 모양으로 뭔가 말했다. 소리는 없었지만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잘했다.'
웃음이 났다. 진짜 웃음은 아니고 헛웃음.
악역을 완벽하게 연기했더니 상장 대신 저 두 글자를 받는다. 게임으로 치면 퀘스트 클리어인데 보상이 없는 거다. 아니, 정확히는 있다. 오늘 저녁밥. 그것도 어쩌면 취소될 수도 있는.
혜린이 다시 눈물을 훔치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위로해주는 손길이 열 개는 넘게 뻗쳤다. 손수건을 건네는 사람, 어깨를 감싸는 사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사람까지. 한 편의 완성된 연극이다. 나한테 뻗친 손은 없다. 당연하지, 방금 못된 짓을 한 악녀니까. 대신 누군가 낮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익숙하다. 삼 년 동안 그 소리만 백 번은 들었으니까.
부채를 접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이 정도쯤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삼 년째 아무렇지 않아지지 않는다. 무뎌지긴 하는데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심장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다.
계단 위 아버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 발걸음 소리, 저거 진짜 무섭다. 규칙적이고 느리고, 다음에 뭘 시킬지 예측이 안 된다. 계단 하나 내려올 때마다 홀 안의 대화 소리가 하나씩 죽었다.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땐 완전한 정적이었다. 무슨 시상식 시상자 등장 같은데, 상 대신 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유일한 차이다.
"강서은."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명령 같았다. 나는 등을 세우고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뭘 요구할까. 오늘 밤 또 뭘 하라고 할까. 머릿속으로 최근 몇 달간의 명령 목록을 빠르게 되짚었다.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거나, 누구의 파티를 대신 준비하라거나, 누구에게 대신 사과하라거나. 전부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오늘 밤 응접실로 오도록 해라."
그 한마디에 홀 안의 온도가 갑자기 떨어진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눈을 살짝 피하는 게 보였다. 저 반응, 좋은 신호가 아니다.
응접실. 저 단어가 붙는 밤은 절대 좋은 일이 없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응접실로 불려간 밤은 다섯 번이었고, 그중 웃으면서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이 여섯 번째가 될 거라는 사실이, 부채를 쥔 손끝을 자꾸 차갑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