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왕따, 여왕의 공범

5화

딸랑. 편의점 문을 나서며 유니폼 조끼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감 정리까지 마치고 나온 시각이 열한 시 반. 골목은 벌써 인적이 뜸했고,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노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발바닥이 뻐근했다. 하루 종일 서서 계산대를 지킨 다리가 남의 다리처럼 무거웠다. 그때, 골목 어귀에 낯익은 그림자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큰 키에 곧게 뻗은 어깨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무심하게 서 있는 자세. 지원이었다. "……지원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지원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담담한 물음이었지만,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숨기지 못했다. 밤늦게 이런 골목에서, 하필 이 사람과 마주치다니. "알바 마치고 가는 길이에요." 대답하자 지원은 잠시 나를 훑어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검사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네?" "받아."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아 든 봉투 안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 포장지에 인쇄된 로고부터 근처 편의점 물건은 아니었다. "먹고 다녀. 얼굴이 반쪼가리야."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 안에 담긴 배려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지원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멈춰 서서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그날 밤, 방에 돌아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그 짧은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 그날부터 지원은 아주 가끔, 마치 우연을 가장한 듯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매점 앞에서 우유를 건네거나,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 조용히 자리를 옆으로 옮겨주거나. 한번은 체육 시간에 넘어져 무릎이 까진 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밴드 하나를 내밀고 지나간 적도 있었다. 어디서 그런 걸 늘 들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큰 호의는 아니었다. 누가 보면 그냥 지나가다 툭 던지는 물건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이 하나둘 쌓일수록, 나는 지원의 무표정 안에 숨겨진 다정함을 조금씩 읽어내게 됐다.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게 지원의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소미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소미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손을 흔들었고, 급식실에서는 옆자리를 비워두었다. 그런데도 그 웃음이 예전처럼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지원과 마주칠 때 느껴지는 그 이상한 안도감과, 소미를 볼 때 느껴지는 미묘한 불안감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저울 위에 올라선 것처럼,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한 채로. *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늦은 밤 어머니가 병원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지지직, 전화기 너머로 병원 특유의 소음이 섞여 들려왔다. 안내 방송 소리, 카트 바퀴 굴러가는 소리. "태오야, 엄마 이번 달 병원비 좀 늦어질 것 같아. 미안해." 어머니의 목소리는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괜찮아, 엄마. 천천히 해도 돼."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얬다. 우리 집은 늘 그런 식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는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자주 짓눌렸다. 편의점 알바로 버는 돈은 늘 티도 나지 않게 작았다. 갑자기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 소미의 다정한 목소리, 지원의 무표정한 눈빛 같은 것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나는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죽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다가, 나는 스스로 놀라 그 생각을 황급히 밀어냈다. * 다음 날 학교에서, 나는 복도 끝에서 소미가 몇몇 여자애들과 함께 서 있는 걸 보았다. 무리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며 소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자, 소미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눈은 이쪽을 힐끗 향했다. 그 순간, 나는 또 그 이상한 이물감을 느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나는 뭔가에 걸려 있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리가 흩어지고 소미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걸 눈으로 좇았다. 저 웃음이, 저 속삭임이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태오야."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은서였다. 그 애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조심해." 짧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은서는 다시 뒤돌아 걸어갔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조심하라니. 무엇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소미가 서 있던 자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그 자리에는 방금까지 있었던 웃음소리의 흔적만 공기 중에 떠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다시 소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었다. 눈이 살짝 접히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늘 봐왔던 그 미소. 하지만 그 웃음 뒤로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눈동자 깊은 곳에서 다른 빛깔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던 나만 빼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명치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소미가 다시 웃으며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오야, 왜 그렇게 서 있어?"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다정함. 그런데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은서의 다급한 눈빛과, 방금 스쳤던 소미의 이상한 표정이 자꾸만 겹쳐졌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등줄기에 남은 서늘한 감각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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