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딸랑, 교문 옆 편의점 종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질 때까지도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신발 끈이 풀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묶지 않은 채 그대로 걸었는데, 어차피 누구도 내 발밑을 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입김이 하얗게 번져나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목도리 하나 두르지 않은 채 걸었다. 목도리는 작년 겨울 어머니가 사준 것이었는데, 벌써 낡아서 목덜미 쪽 실밥이 풀려 있었다. 그걸 두르고 있으면 애들이 또 뭐라고 할까 봐, 나는 가방 속에 그대로 구겨넣고 다녔다.
3월 초, 새 학기가 시작되고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반 아이들의 이름 절반도 외우지 못했고, 반대로 그 애들은 내 이름 자체를 몰랐다. 강태오. 출석부에나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조차 내 이름 앞에서 잠깐 멈칫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다른 애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자리 몇몇이 왁자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소리 한가운데 내 체육복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창밖으로 던지려는 시늉을 하며 낄낄거리다가 나를 발견하자 오히려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바람이 훅 들어와 체육복 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세게 던졌다면 정말로 3층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어, 왔네."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가 체육복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며 말했고, 나는 그걸 주우러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릎을 굽혀 옷을 집어드는 그 짧은 순간 목덜미가 뜨거워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뭐라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게 나에 대한 말인 것은 분명했다. 익숙했다. 이런 일은 벌써 몇 번째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처음엔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떨렸는데, 이제는 그런 반응조차 무뎌져서 그냥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줍고, 털고, 자리에 앉고.
자리에 앉아 가방을 열자 필통 안에서 부러진 샤프가 나왔다. 언제 부러졌는지도 모를 그 샤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손끝으로 몇 번 만지고 다시 넣었다. 샤프심이 부서진 자국이 필통 안쪽 천에 검게 얼룩져 있었다. 화를 낼 힘도, 항의할 용기도 내겐 없었다. 옆자리 애한테 물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물어보는 순간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온 지도 이제 삼 년이 넘었는데, 그 삼 년 동안 나는 스스로 목소리를 낮추는 법만 배운 것 같았다. 큰 소리를 내면 뭔가 깨질 것 같았고, 눈에 띄면 더 아플 것 같았다. 조용히, 조용히.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셨고, 그 사이 나는 혼자 밥을 차려 먹고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잠들었다. 가끔은 그 조용함이 무섭기도 했다. 집에 있어도, 학교에 있어도, 나는 늘 혼자였으니까.
1교시 수업 시간,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다가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제저녁 늦게 들어온 어머니가 부엌 식탁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용기도 없어서, 나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문 너머로 어머니의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점심시간 급식실 줄에서도 나는 늘 맨 끝이었다. 누군가 슬쩍 끼어들어도 항의하지 않았고, 식판을 받아 자리를 찾을 때도 빈자리보다 구석을 먼저 눈으로 훑었다. 급식실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는데, 그 소란 속에서 나는 늘 투명인간처럼 움직였다. 식판에 밥과 반찬이 담기는 걸 보면서도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어머니가 오늘은 일찍 오실까, 그런 생각들.
그날도 마찬가지였는데, 식판을 들고 두어 걸음 옮기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팔이 쑥 뻗어와 내 어깨를 툭 밀쳤다. 균형이 무너지며 식판이 기울었고, 국물이 손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뜨거웠다.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들 용기조차 나지 않아 그냥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미안해요."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하얀 손 하나가 내 손등에 묻은 국물을 냅킨으로 닦아내고 있었는데, 그 손이 닿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고, 손톱 끝에는 옅은 분홍색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처음 보는 얼굴이 내 눈앞에 있었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이었다. 한소미. 입학 첫날부터 신입생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했던 그 이름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저 때문에 부딪힌 거죠? 죄송해요, 제 친구가 장난이 심해서." 소미는 눈썹을 살짝 내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순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이 갓 잡힌 활어처럼 펄떡거리는 걸 느끼며, 겨우 고개만 저었다. 급식실의 소음이 갑자기 멀리 물러난 것 같았고, 오직 소미의 목소리만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아, 아니에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내 목소리가 이렇게 떨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소미는 웃으며 내 식판 위에 새 냅킨 한 장을 더 올려놓았고, 그러고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국물이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방금 닿았던 손의 온도만 계속 손등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뒤에서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밥을 먹는 내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누군가 나를 향해 웃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그날 이후로 나는 급식실에서 자꾸 소미의 자리를 흘끗거리게 됐다. 소미는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웃음소리는 언제나 급식실 한가운데서 가장 밝게 퍼져나갔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도, 하루 종일 손등의 온기만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심지어 체육복을 다시 주워 담을 때조차도. 어쩌면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던 세계에, 처음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눈빛이 생겼다는 사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창밖을 보는 대신 손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국물 자국은 다 지워졌는데도, 그 자리가 여전히 뜨거운 것 같았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언제부터 내 것이었는지.
하지만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 꺼진 집 안이 나를 맞았고, 어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혼자 밥을 차려 먹으면서도 나는 계속 소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하필 그 많은 애들 중에 나였을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도, 나는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미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다시 만져보았다. 그 냄새, 그 목소리, 그 눈빛.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그 순간이 하루 종일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나를 붙잡을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예감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아직도 미세하게 뛰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