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도현이 눈을 뜬 곳은 낯선 천장 아래였다.
흰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애매한 크림색 벽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온몸이 무겁고 축축했다.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도현은 몇 번이나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다가, 그마저 힘들어서 그만두었다.
창밖에서 낮게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인데, 뭔가 어긋나 있었다. 정확히 뭐가 어긋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현은 그 불편함을 몸으로 먼저 느꼈다.
'새 소리가 왜 이렇게 낯설지.'
이상한 일이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낯섦을 느꼈다는 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도현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어긋나 있었다. 벽지도, 공기 냄새도, 심지어 자기 숨소리마저도.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일어났어요?"
낮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문틈으로 들어온 여자는 삼십 대쯤 되어 보였는데,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와 피곤이 배어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도현은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이 세계 자체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누구세요." 도현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목이 다 갈라져서 제 목소리 같지도 않았다.
"강소율이에요." 여자가 짧게 답하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골목에서 쓰러져 있는 걸 제가 데려왔어요. 벌써 사흘째예요."
사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사흘 동안 내가 여기서 자고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병원 복도의 형광등 불빛뿐이었다. 그 이후는 텅 비어 있었다.
병원. 그 단어를 떠올리자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뭐였는지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안개 속에서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소율이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운 거리감도 함께 있었다.
도현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낯선 손이었다. 아니, 낯설다고 하기엔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손이었는데,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손가락 마디의 굳기, 손톱의 모양, 심지어 피부의 감촉까지도.
'뭐지, 이거.'
손등을 몇 번이나 문질러 보았다. 감촉은 익숙한데, 눈에 보이는 모양은 어딘가 이상했다. 손톱 끝이 유난히 매끈했다. 원래 이렇게 다듬어져 있었나. 도현은 기억을 뒤져봤지만, 이런 손톱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사흘 전으로 돌아가면, 강소율은 그저 늦은 퇴근길이었다.
금요일 밤이었고, 가게 마감을 도맡아 하다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골목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 쓰레기봉투 더미 옆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처음엔 술 취해 뻗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가가서 보니 숨이 얕고, 몸이 차가웠다. 소율은 그 자리에서 몇 초쯤 갈등했다. '그냥 지나갈까.' 이 시간에 낯선 남자를 데려간다는 게 여러 의미로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주변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유독 희미하게 깜빡였고, 골목 안쪽에서는 고양이 울음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신고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이 근처 파출소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소율은 이상하게도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이 세상에 발 디딜 곳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낯빛이 새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다. 소율은 손을 뻗어 남자의 목에 손가락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약하게, 하지만 분명히 뛰고 있었다.
'죽기 직전이었네.'
그 생각이 들자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소율은 그를 부축해 택시에 태웠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사흘 동안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첫날은 미열이 계속됐다. 둘째 날은 몸을 뒤척이며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셋째 날 새벽에야 겨우 열이 내렸다. 소율은 그동안 죽을 끓이고, 물수건을 갈아주고, 틈틈이 숨소리를 확인했다. 회사에는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양해를 구했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했다.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이다니. 하지만 소율은 그 말들을 대충 흘려들었다. 원래 남의 말에 크게 흔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친구 하나는 전화로 대놓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너 제정신이야?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소율은 그 말에 그냥 웃고 넘겼다. 걱정은 걱정이고, 이미 데려온 사람을 다시 골목에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다시 현재. 도현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소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긴 어디예요." 도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제 집이요." 소율이 답했다. "주소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일단 몸이나 추스르세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럴 수 있어요. 병원 데려가려고 했는데 신원 확인이 안 돼서요.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소율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이름은 알아요?"
"이도현이요."
소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어딘가 낯선 발음처럼 들리는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네요." 소율이 중얼거렸다.
"흔하지 않아요?" 도현이 눈을 깜박였다. 한국에서 이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특이한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일단 씻고 뭐라도 좀 드세요. 얼굴이 백지장 같아요."
도현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균형을 잃었다. 소율이 재빠르게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그 손길이 생각보다 힘이 셌다.
'이 여자, 보통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도현은 곧 그것을 별거 아닌 착각으로 넘겨버렸다. 아마 근력 운동을 좀 하는 여자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
소율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도현은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작은 화장대 위에 놓인 화장품 병들, 벽에 걸린 몇 장의 사진, 그리고 옷장 문틈으로 삐져나온 옷자락들. 평범한 여자의 방이었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장실로 걸어가는 짧은 거리 동안에도 도현은 몇 번이나 벽을 짚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소율이 옆에서 부축하며 걸음을 맞춰줬다.
"천천히요. 사흘이나 누워있었으니 당연히 그래요."
씻고 나온 도현은 소율이 차려준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았다. 숟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술 뜨는 사이, 창문 너머로 낮의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여자들이, 유난히 활기차고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반면 남자들은 어딘가 눈치를 보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도현의 눈이 그 풍경에 멈췄다.
숟가락을 든 채로 도현은 창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남자 하나가 여자 무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런 걸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신이 또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