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가지 마.
그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소매를 붙잡힌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숨소리는 얕고 불규칙했다. 잠결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끝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교복 치마 밑으로 드러난 무릎이 시렸다.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나는 그 추위를 느끼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방 안은 어두웠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 빛이 침대 위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협탁 위에는 다 먹은 알약 봉투와 체온계, 그리고 낡은 곰돌이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음꽃이라는 별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귀 한쪽이 닳아서 실밥이 풀려 있었고, 색도 누렇게 바랬다. 누군가 오래도록 껴안고 잔 흔적이었다.
나는 그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 방 안에 그녀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넓은 집이었다. 값비싼 가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벽에는 액자도 몇 개 걸려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집이었다.
삼십 분쯤 지나서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몇 시야." 목소리가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세 시쯤 됐어요." 나는 대답하며 슬쩍 소매를 확인했다. 손은 어느 순간 풀려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마의 열이 조금 내려간 듯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붉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은 아직도 초점이 흐릿했다.
"배고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작은 끄덕임이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서 그녀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원하는 걸 드러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부엌으로 갔다.
부엌은 넓고 깨끗했지만, 조리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봤다. 물병 몇 개와 반찬통 몇 개, 그리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 한 팩이 전부였다. 사람이 요리를 해 먹는 부엌이 아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재료를 꺼냈다. 즉석 죽 대신 직접 끓여보려고 쌀과 계란, 참기름을 챙겨왔었다. 요리는 자신 없었다. 밥을 태우거나 간을 엉망으로 맞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계량스푼과 레시피 화면을 번갈아 보면서, 최대한 신경 써서 죽을 끓였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쌀알이 냄비 안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리, 나무 숟가락이 냄비 벽을 긁는 소리.
그 소리들이 조용한 부엌을 채웠다.
보글보글.
냄비 안에서 죽이 끓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사흘 전 혼자 아팠던 내 자신을 떠올렸다. 열이 올라 온몸이 땀에 젖었는데,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 한 잔 가져다줄 사람도 없어서, 어지러운 채로 부엌까지 기어가야 했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 이런 소리를 내주길 바랐다. 이렇게 냄비 안에서 뭔가가 끓는 소리, 누군가 나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그 작은 기척을.
지금 내가 그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죽은 조금 질척했다. 간도 딱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그릇에 담아 방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까보다 더 헝클어져 있었고, 후드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이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게, 마치 그림 속 인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먹어봐요." 나는 그릇을 건넸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가 다시 펴졌다. 맛이 이상한가 싶어 심장이 조금 조여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먹었다. 나는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맛없어?"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리고 잠시 후 덧붙였다. "...맛있어."
작은 목소리였는데,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나는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웃음이 좀 어색하게 나왔다.
그녀는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조금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다. 학교에서 봤던 무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뺨에 살짝 오른 홍조와, 반쯤 감긴 눈, 느슨해진 어깨선까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빈 그릇을 받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곰돌이 인형이 그 옆에서 나를 빤히 보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내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왜."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 같아서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숟가락을 그릇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학교에서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야 아무도 안 다가오니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깊은 이야기라는 건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벽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불 위로 떨어졌다.
"다가오면 안 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다가오면..." 그녀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귀찮은 일이 생기니까."
"어떤?"
그녀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를 억누르는 손짓처럼 보였다.
"부모님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외에 계셔." 그녀가 대답했다. "몇 년째 그래."
그 말투가 담담했다. 익숙해진 외로움이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오랫동안 그 사실을 곱씹고 곱씹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협탁 위에 있던 체온계를 들어 다시 열을 재보게 했다.
그녀는 순순히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몇 초가 지루하게 흘렀다. 삐- 소리가 나고 그녀가 체온계를 뺐다.
삼십칠 점 팔 도.
조금 내려갔다.
"오늘은 여기서 좀 더 있을게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는데,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못 들은 척 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나는 방 안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했다. 협탁 위 알약 봉투를 치우고, 물컵에 새로 물을 받아 왔다. 그녀는 눕고 앉는 것을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불 좀 꺼줄래." 그녀가 말했다.
나는 스탠드를 껐다. 방 안이 어둑해지자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 빛이 더 선명하게 침대 위를 가로질렀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가 다시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에 몇 번이나 내 이름을 확인하듯 불렀다.
"강하준."
"네."
"진짜 이름이지."
"네, 진짜예요."
"어디 안 가고."
"안 가요."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숨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걸 들으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내 몸의 온도였는지도 모른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뒤를 돌아봤다. 복도 끝, 그녀의 방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어둠이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
나는 문을 조용히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집을 나서서 골목을 걷는 동안,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반 단체 채팅방에 새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누구 이서윤 오늘 왜 결석했는지 아는 사람?]
[아프대. 근데 걔가 아픈 거 처음 봄 ㅋㅋ]
[신기하다 얼음꽃도 사람이구나]
[누가 그래?]
[담탐이 그러던데]
메시지들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심장이 조여왔다.
화면을 스크롤하며 더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이서윤이라는 이름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누군가는 걱정하는 척했고, 누군가는 그냥 재밋거리로 여겼다. 얼음꽃이라는 별명이 그렇게 가벼운 손끝으로 여기저기 던져지는 게, 오늘 낮에 봤던 그녀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이상하게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 곰돌이 인형 옆에서 죽 한 그릇을 다 비우던 모습, 담담하게 부모님 얘기를 하던 목소리, 잠들기 전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하던 그 불안한 눈빛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저 채팅방 안의 가벼운 문장들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문득 내일 학교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