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의한 에로게 남주

3화

결투까지 남은 이틀은 생각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한서윤이 매일같이 나를 훈련장으다. 아니, 다시 써야겠다. 정신이 없었던 진짜 이유는 그녀가 새벽부터 방문을 두드려 나를 훈련장으로 끌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본자세도 안 되어 있으면서 무슨 결투를 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팔짱을 끼며 쏘아붙이자, 나는 검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원래 늦게 피는 꽃이 더 화려한 거 아니겠어?" 그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픽 웃고 말았는데, 그 웃음 한 번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걸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거 뭐, 진짜 하렘 게임 히로인이랑 단둘이 훈련이라니.'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그녀가 던진 목검에 정통으로 이마를 맞고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이마가 얼얼했다. 전생에서 헬스장 트레이너한테 잔소리 들을 때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라는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도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음 자세를 지시했다. "발을 그렇게 벌리면 넘어져. 무게 중심을 낮추라고 몇 번을 말해." 그녀가 직접 내 발목을 툭 건드리며 자세를 교정해주었는데, 그 손길이 스치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며 자세가 더 흐트러졌다. "아니, 이건 원래 이런 각도가 맞는 거 같은데." 억지로 우겨봤지만 그녀는 단칼에 잘랐다. "틀렸어. 검술 교본 3장 1절에 나오는 기본자세랑 정반대로 하고 있잖아." 나는 검술 교본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현의 기억 속에는 분명 이 세계의 검술이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게 몸으로 옮겨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게임 속 지식과 실제 근육의 반응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극이 있다는 걸, 나는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훈련 중간중간 그녀는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설명은 마치 잘 짜인 게임 설정집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천국은 귀족과 평민의 신분 격차가 극심한 나라야. 학원은 그나마 실력으로 평등을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족 출신이 모든 요직을 차지해." 그녀가 검을 손질하며 담담하게 설명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강태석은 어떤 위치야?" "단천국 공작가의 유일한 아들. 검술로도 학원 최강자고, 정치적 배경도 최상위야. 그 자식한테 밉보이면 학원 생활이 통째로 망가진다고 봐도 돼." 그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그 집안은 왕실과도 혼맥으로 얽혀 있어서, 학원장조차 함부로 못 건드려." 나는 그 씁쓸함의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청안 백작가는 이미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위치에 있었으니까. 원작 지식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물론 그 지식이 지금 내 목숨을 구해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 이 학원에서 평민 출신이 결투 신청을 받는 게 얼마나 흔한 일이야?" 내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흔하지 않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의 없어. 평민이 귀족한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는 것 자체가 학원 역사상 몇 번 없는 일이야." "그럼 나는 지금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셈인가?" 내가 장난스럽게 되묻자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묘비에 이름을 새기게 될 수도 있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신경 써주는 거야?" 나는 훈련 도중 문득 물었는데,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 평민 출신인데도 포기 안 하는 게 신기해서." 그 대답이 어딘가 얼버무리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굳이 더 파고들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게임 지식을 되짚어보았다. 원작에서 한서윤과 이도현은 이 시점에서 이미 연인 관계였다는 설정이었는데, 정작 지금 이도현의 기억 속에는 그 관계의 시작이 흐릿하게만 남아 있었다. '아, 이거 기억이 온전히 이입된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겹쳐진 건가.' 그런 분석을 하는 동안,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었는데, 그 손길에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가 이내 헛기침으로 그 어색함을 무마했다. "왜 그렇게 놀라?"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니, 그냥 땀이 많이 나서 민망해서."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다시 검을 들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면서 훈련장의 흙바닥에 우리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문득 이 상황이 참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임 속 세계에 빙의해서, 게임 속 히로인과 단둘이 검술 훈련이라니. 전생에서는 이런 장르의 소설을 볼 때마다 주인공이 참 팔자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그 주인공 자리에 서 있으니 팔자 좋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목검을 든 손바닥에는 이미 물집이 두 개나 잡혀 있었다. "결투에서 이길 방법은 없어." 훈련이 끝날 무렵,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강태석의 실력은 이미 성인 기사급이야. 너는 아직 검술의 기초도 다 못 익힌 상태고." 그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냥 도망갈까?"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면 그건 평민 전체의 굴욕이 돼. 학원에서 평민 출신이 대표로 나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징적인 일이야." "상징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나는 반박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상징이 밥은 안 먹여줘도, 상징이 없으면 평민들은 아예 학원에 발도 못 들여놓게 될 거야. 지금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자리라고." 그 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저 하늘색이 딱 내 상황 같았다. 예쁘긴 한데, 곧 어두워질 예정이라는 게.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녀가 짐을 챙기며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나는 귀가 번쩍 뜨여 물었다. "뭔데, 빨리 말해봐." "결투 규칙에는 무기 종류에 대한 제한이 없어. 검이 아니라 다른 무기를 써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그럼 나는 총을 쓰면 되겠네." 내 농담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총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런 걸 썼다간 반칙으로 실격 처리될 거야. 마법이나 기물 사용도 다 규정에 걸려." 결국 남는 건 순수한 검술뿐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저녁, 학원 정문 근처를 지나던 중 나는 우연히 강태석의 시종 무리가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담벼락 옆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공자님이 이번 결투는 그냥 웃기려고 하시는 것뿐입니다." 한 시종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청안 백작가 계집이 그 평민 놈한테 마음을 준 게 눈꼴시다고 하셨죠. 이번에 아예 학원에서 못 견디게 만들어버릴 생각이라던데요." 또 다른 시종이 맞장구쳤다.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한 놈 쫓아냈잖습니까.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려도 학원 측에서는 정식 결투였으니 문제없다고 넘어갈 거고." 그 대화를 엿듣는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이 결투가 단순한 학원 행사가 아니라, 강태석의 개인적인 질투와 악의가 뒤섞인 함정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시종 하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게다가 공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게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요. 결투 전에 그 평민 놈 몸 상태를 미리 망가뜨려 놓겠다고 하셨죠. 밤사이에 손을 좀 써두면 결투장에 나가기도 전에 끝날 거라고." 그 말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실력 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태석은 아예 결투 자체가 성립되지 않도록 나를 먼저 해치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잖아.' 게임 시나리오에는 분명 이런 뒷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아니면 내가 놓친 부분인가. 결투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지금, 나는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저 불안감만 키우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워진 복도의 창문 너머로 달빛이 스며들었고, 그 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손을 써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나는 애써 상상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문을 잠그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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