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의한 에로게 남주

2화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사부라 불리는 노년의 검술 교관이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명단을 펼쳐 들었는데, 그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훈련장 바닥은 밤새 내린 이슬로 축축했고, 흙냄새와 쇠 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정렬한 학생들의 숫자만 해도 오십 명은 족히 넘어 보였는데, 그 앞에 선 교관의 등은 굽었어도 목소리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카랑카랑했다. "이번 학기 대표 결투전 출전자를 발표하겠다." 교관의 목소리가 훈련장 전체에 울리자,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 낮은 술렁임이 퍼졌다. 나는 옆에 서 있던 한서윤을 슬쩍 곁눈질했는데,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무표정이야말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이벤트가 있었나.' 게임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표 결투전이야말로 이도현이 강태석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짓밟히는 초반 이벤트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것도 그냥 짓밟히는 게 아니라, 전교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 장면까지 컷신으로 나왔던 기억이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팔짱을 꼈다. "평민부 대표, 이도현." 교관의 입에서 내 이름이—아니, 이도현의 이름이—튀어나오는 순간, 훈련장 전체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의 무게가 실제 압력처럼 느껴져서 나는 어깨가 뻐근해지는 감각을 받아냈다. 마치 수백 개의 화살촉이 동시에 겨눠진 느낌이랄까, 게임할 때는 그냥 텍스트로 스치듯 지나갔던 장면인데 실제로 당하니 이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건지 몰랐다. '아니, 나 지원한 적 없는데.' 속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여유롭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토리대로 진행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는 자조와, 혹시 내가 게임 흐름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가 동시에 부딪혔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헛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명단에 이름이 박힌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이럴 때 보면 원작 시나리오라는 놈이 참으로 융통성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귀족부 대표는, 이변 없이, 강태석." 교관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훈련장 반대편에서 흑발의 소년이 검을 어깨에 걸친 채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게임 원화보다 훨씬 위압적인 인상의 소년이었다. 원화에서는 그저 새하얀 피부에 차가운 눈매로만 그려졌던데, 실물로 보니 그 차가움 밑에 뭔가 시커먼 게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검을 걸친 어깨의 균형감이나 걸음걸이의 무게중심만 봐도, 저게 그냥 재능만 좋은 게 아니라 뼈를 깎듯 단련한 몸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강태석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그 미소가 어딘가 먹이를 발견한 맹수의 것처럼 보여서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평민 출신이 대표라니, 재밌겠군." 그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주변 귀족 학생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몇몇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몇몇은 아예 노골적으로 손가락질까지 했다. 나는 그 비웃음을 애써 무시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침착해. 게임 시나리오 알잖아. 여기서 위축되면 답 없어.' 그러면서도 발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 느꼈고,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 발을 살짝 뒤로 물렸다. "결투일은 사흘 후, 학원 본관 앞 결투장에서 진행된다." 교관이 사무적으로 일정을 공지하고 자리를 뜨자, 학생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승부를 예상하며 내기를 거는 소리도 들렸는데, 그 내기의 배당률이 압도적으로 강태석 쪽에 기울어 있다는 게 참으로 씁쓸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강태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다가온 한서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 눈빛만큼은 평소의 무표정과 달라서, 나는 순간 그녀가 이렇게 걱정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하고 새삼 놀랐다. 나는 애써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그냥 갑자기 지명돼서 좀 얼떨떨해서."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강태석은 학원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조심해." 그 말이 유독 무겁게 가슴에 박혔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그 자식이 얼마나 사기 캐릭터인지 스탯창 다 봤으니까.' 강태석의 검술 스탯은 초반 보스급으로 책정되어 있었고, 이도현의 스탯은 딱 그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임할 때는 그냥 스킵하고 지나갔던 튜토리얼성 패배 이벤트였는데, 지금은 내 목숨—아니, 이도현의 몸이 걸린 문제였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걱정 마, 어떻게든 해볼게."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다짐이었는지는, 사흘 뒤에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었지만. 한서윤은 그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떻게든, 이라니. 구체적인 대책이 있는 거야?" 그녀의 질문은 짧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의 결은 분명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충 둘러댔다. "일단 검술 훈련부터 열심히 해봐야지. 사흘이면 그래도 뭐라도 되지 않겠어?"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궁색한 변명인지 알고 있었다. 사흘로 천재를 따라잡는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서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 손끝에 머물렀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왠지 그녀도 이 결투의 결과를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도현의 몸에 남아 있는 검술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다. 눈을 감고 팔을 허공에 몇 번 휘저어 보기도 했고, 손목의 각도와 어깨의 회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손끝에 남은 감각은 검을 겨우 몇 번 휘둘러본 초심자의 것에 불과했다. 마치 튜토리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캐릭터의 손맛이랄까, 검을 쥐는 각도부터 어설퍼서 나는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원작 스토리대로군.' 이도현은 재능은 있으나 아직 미숙한 검사였고, 강태석은 이미 완성된 천재였다. 그 격차를 사흘 안에 메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게임 시스템이라면 레벨업 포션이라도 마시고 스탯을 올렸겠지만, 여긴 그런 편리한 시스템 따위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낮은 발소리에 몸을 굳혔다. 발소리는 정확히 내 방 창문 아래에서 멈췄고, 잠시의 정적 끝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흘 후가 기대되는군, 평민 나부랭이." 강태석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고,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귀에 착 감겨 붙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창밖을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이 남아 있을 뿐, 인기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저 자식, 대체 어디서부터 내 방 위치를 알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저렇게 조용히 다가왔다가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실력이라면 검술뿐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나는 창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사흘 후, 학원 본관 앞 결투장에서 벌어질 일이 벌써부터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