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호감도 폭주 노예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남은 동화를 세었다. 열두 개였다. 한 번, 두 번. 다시 세어봐도 열두 개였다. 세 번 세어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세 번을 셌다. 빵 두 조각과 물 한 병을 사면 딱 끝나는 돈이었다. 반찬은 사치였고, 고기는 전생의 기억 속에나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집세 다섯 냥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정확히는 갈 길이 없었다. 나는 낡은 벽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벽지에는 곰팡이가 지도처럼 번져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얼룩이 대충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게 아니라 내가 정신이 나가고 있는 거였다. 도둑질은 걸리면 손목이 날아가는 도시다. 은월시의 치안대는 무능한 편이지만, 도둑질에 관해서만큼은 이상하게 유능했다. 노동은 신념에 반한다. 정확히는 이 회귀한 몸뚱이로 하루 열두 시간씩 짐을 나르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도 실컷 일했으니 이번 생에는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이었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호감도 조작으로 사기를 치는 것. 문제는 이 스킬이 이미 은월시 절반의 상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최 씨 할머니처럼, 몇 번 당하고 나면 호감도 게이지가 가득 차서 더는 통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게이지가 가득 차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만 보면 지갑을 꽉 붙잡는 반사 신경이 생겨버렸다. 이건 스킬의 문제가 아니라 신용의 문제였다. 새로운 대상을 찾아야 했는데, 새로운 대상을 찾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었다. 시장을 돌면서 낯선 얼굴을 물색하고, 적당히 접근해서 호감을 사고, 그다음에야 스킬을 쓸 수 있었다. 노동을 피하려고 쓰는 스킬인데 그 준비 과정이 노동이라니. 아이러니했다. 나는 동화 열두 개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새로운 얼굴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사채업자였다. 정확히는 사채업자의 심부름꾼, 덩치가 문짝만 한 남자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부터 남달랐다. 쿵쿵쿵. 노크라고 하기엔 문이 부서질까 걱정이 될 정도의 세기였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는 문틀에 어깨가 걸릴 만큼 컸고, 팔뚝은 내 허벅지보다 두꺼웠다. "강태오 씨, 지난달 빌린 은화 세 냥, 이자까지 합쳐서 다섯 냥." 남자는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목소리에 억양이 없었다. 협박이라기보다는 사무적인 통보였다. 은행 창구 직원이 대출 만기를 알려주는 것 같은 어조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종이에는 깔끔한 필체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원금 세 냥, 이자 두 냥, 합계 다섯 냥. 이자율을 계산해 보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이자를 받고도 저렇게 무표정할 수 있다니, 이 도시의 사채업은 정말 건전하게 사악했다. 지난달 빌린 돈이었다. 정확히는 지지난달. 그때는 급전이 필요했고, 며칠 안에 갚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자가 이렇게 붙을 줄은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갚을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그 자신감이 오만이었다는 걸 지금 깨닫고 있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세 번은 다시 읽었을 텐데,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셈을 그렇게 잘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존댓말을 유지하며, 최대한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호감도 조작. 정신력이 소모되는 느낌. 관자놀이 안쪽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 게이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딱 그만큼이었다. 이 남자는 심부름꾼일 뿐, 결정권이 없었다. 게이지가 얼마나 오르든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헛수고를 한 걸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정신력은 유한한데 이걸 이렇게 낭비하다니. "시간은 없습니다. 사흘 드릴게요. 그 이상은 저희 쪽에서도 곤란합니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의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는 걸 다 듣고 나서야 나는 문을 닫았다. 사흘. 집세도 사흘, 빚도 사흘. 공교롭게도 마감일이 겹쳤다. 이건 세계가 나를 놀리는 게 분명하다. 누가 스케줄을 짰는지 몰라도, 최소한의 자비심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방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 등뼈 하나하나가 낡은 나무판에 닿는 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말랐다. 은화 다섯 냥, 거기에 다섯 냥. 합쳐서 열 냥. 지금 내 수중에는 동화 열두 개. 계산이 안 맞아도 이렇게까지 안 맞을 수가 있나. 나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어가며 다시 계산해봤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계산한 게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였다. 결과는 똑같았다. 동화 열두 개로 은화 열 냥을 만들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전에서 기적이라도 내려주지 않는 이상. 이럴 때 신념 같은 걸 챙길 여유는 없었다. 도둑질도, 노동도, 사기도 다 검토했지만 어느 것도 사흘 안에 은화 열 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마지막으로 미뤄뒀던 선택지를 떠올렸다. 박덕수. 흑시장에서 낯선 물건을 판다던 그 상인. 재밌는 물건이 있다고 했었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뭐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날 밤, 나는 결국 흑시장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도망치듯 향했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박덕수가 말한 '재밌는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와 얘기하면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내 형편에는 본전조차 없었으니 잃을 것도 없었다. 은월시 흑시장은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가진 곳이었다. 낮에는 평범한 골동품과 잡화가 늘어선 시장이지만, 밤이 되면 뒷골목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열렸다. 나는 그 계단을 내려가며 후회했다. 이 도시에서 3년을 살았지만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계단은 좁고 미끄러웠다. 벽을 짚은 손바닥에 축축한 이끼가 묻었다. 발밑에서 돌계단이 조금씩 무너져 있는 게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나는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 뻔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는 습하고, 곰팡이와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거기에 더해 뭔가 비릿한 냄새도 났는데, 그게 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쇠사슬 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사람을 파는 곳이니 당연했다.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박덕수의 좌판을 찾아갔다. 좌판 사이를 지나며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떤 좌판에는 낡은 무구가 쌓여 있었고, 어떤 좌판에는 약초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몇몇 좌판 뒤에는 사람이, 정확히는 사람이었던 것들이 앉아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곳에서 눈을 마주친다는 건 관심을 표하는 것과 같았고, 관심을 표하는 순간 흥정이 시작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이, 왔네." 박덕수는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진심인지 장사꾼의 습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으로 이를 후비고 있었다. 그 자세만 보면 여기가 지옥 초입이 아니라 동네 정미소 같았다. "그, 강철의 방패라는 사람 말이에요."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시간이 아까웠다. 여기서 오래 서 있다가 다른 상인들 눈에 걸리면 또 뭔가를 팔려고 달려들 게 뻔했다. "오, 관심 생겼나?" 박덕수가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이 마치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재고를 마침내 처분할 기회를 얻은 사람 같아서, 나는 뭔가 잘못된 곳에 발을 들였다는 예감이 들었다. "싸게 넘길 수 있어.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서, 아무도 안 사려고 해. 관리 비용도 안 나오니까." "얼마인데요." "은화 한 냥." 나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S급 모험가, 강철의 방패라 불리던 인물이 은화 한 냥. 최 씨 할머니에게 갚아야 할 집세의 오분의 일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사채업자에게 갚아야 할 돈의 십분의 일이었다. "그렇게 싸요?" "싼 게 아니라 아무도 안 사서 그래. 데려가서 뭘 시켜도 반응이 없어.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가끔 발작하듯이 자기 몸을 긋기도 한다더군." 박덕수는 심드렁하게 설명했다. 상품 하자를 설명하는 말투였다. 마치 냉장고 문이 잘 안 닫힌다거나 세탁기 배수구가 막혔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골치야. 데리고 있는 동안 자해라도 크게 하면 관리 책임이 나한테 오니까. 자네가 사가면 나야 좋지." 나는 잠시 계산했다. 은화 한 냥. 그 정도면 지금 수중의 돈으로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무너진 전투노예를 산다고 해서 내 집세와 빚이 해결될 리는 없었다. 그 여자를 팔아서 돈을 벌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팔 수 있는 상태라면 박덕수가 이렇게 싸게 넘길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관심이 가는 거지.' 나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만약 그 여자가 정말로 S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 여자의 주인이 된다면, 무언가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정확히 뭐가 바뀌는지는 몰랐지만, 지금보다 나빠질 수는 없다는 확신은 있었다. 지금 내 상황이 나빠질 수 없다는 확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는 이때는 몰랐다. "보여주세요." 나는 말했다. 박덕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이 어쩐지 불길했다. 이가 몇 개 빠진 웃음이었는데, 그게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좋아, 이쪽으로." 그는 나를 지하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통로가 좁아지고,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벽에 걸린 등불의 수가 줄어들면서 시야도 점점 좁아졌다. 발밑에서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앞서 걷는 박덕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은화 한 냥으로 뭘 살 수 있을지 계산했던 조금 전의 나 자신이 우스웠다. 이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끼익. 끼이익. 철창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하윤을 보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