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호감도 폭주 노예

1화

집세 납부 기한, 3일 남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며 그 사실을 세 번째로 곱씹었다. 곱씹어도 돈이 생기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천장 벽지에는 곰팡이가 지도처럼 퍼져 있었다. 저 갈색 자국을 보고 있으면 남아메리카 대륙이 떠오른다는 걸, 나는 이 방에 산 지 3년째 되어서야 알았다. 쓸데없는 지식이었다. 은화 다섯 냥으로 바꿀 수 없는 지식은 다 쓸데없다. 내 이름은 강태오. 원래 세계에서는 야근과 카드값에 짓눌려 살다가 어느 날 트럭에 치여 죽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은월시라는 낯선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몸은 스무 살 초반쯤으로 젊어졌고, 눈앞에는 반투명한 창이 하나 떠 있었다. 상태창이라고 하는, 어디서 본 듯한 그 물건. 능력치는 볼품없었다. 힘, 민첩, 체력 모두 평균 이하. 그나마 특별한 게 있다면 스킬 하나였다. [호감도 조작 (F급) - 대상과 시선을 마주친 상태에서 정신력을 소모해 호감도 게이지를 소폭 상승시킨다. 지속시간 짧음. 전투 관련 효과 없음.] 처음 이 문구를 봤을 때 나는 웃었다. 이세계에 떨어졌으면 마검이나 파이어볼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3년간 이 F급 스킬로 굶지 않고 살아왔다. 방식은 간단했다. 집주인을 보고, 눈을 맞추고, 정신력을 조금 태워서 호감도를 올린다. 그러면 월세가 하루, 이틀, 사흘 밀린다. 밥값도 비슷했다. 식당 주인의 눈을 보고, 살짝 웃고, 정신력을 태우면 국밥 한 그릇이 그냥 나왔다. 노동은 하지 않았다. 노동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정확히는 하기 싫었다. 이 방식에는 규칙이 있다. 첫째, 상대와 시선을 맞춰야 한다. 눈을 피하는 상대에게는 걸리지 않는다. 둘째, 정신력을 태우는 만큼 게이지가 오르는 것이지,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이 한정돼 있다. 셋째, 이건 오늘 처음 알았는데, 게이지에는 상한선이 있다. 이미 가득 찬 컵에는 물을 더 부어도 넘칠 뿐이다. 문제는 오늘이었다. 끼익. 끼이익. 계단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집 주인, 최 씨 할머니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기 전에 나는 이미 웃는 표정을 만들어두었다. 사교적인 표정은 공짜다. 3년 동안 나는 이 표정 하나로 방세 절반을 아꼈다. 정확히 계산하면 은화로 백 냥은 족히 넘을 것이다. 웃음 하나로 백 냥을 벌었으면 나는 이미 상당한 자산가여야 한다. 현실은 통장에 동전 몇 개뿐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태오 총각,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야." 할머니는 팔짱을 낀 채 문턱에 서서 말했다. 목소리에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단호함이라니. 좋지 않은 신호다.'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호감도 조작. 정신력이 약간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작은 게이지 바가 떠올랐다. 할머니의 호감도. 평소라면 여기서 바가 슬쩍 차올라야 했다. 오늘은 달랐다. 게이지는 이미 가득 차 있었고, 더는 올라가지 않았다. 망했다. 나는 한 번 더 정신력을 밀어 넣어봤다. 게이지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이미 물이 가득 찬 항아리에 바가지로 물을 붓는 기분이었다. 넘치기만 하고 차오르지는 않는다. 이럴 때 정신력만 낭비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 눈빛, 이제 안 통해." 할머니가 피식 웃었다. "세 달째 그 표정으로 나를 구워삶으려 들었잖아. 나도 사람이야. 질리면 그만이라고." "할머니, 저 그런 거 안 했는데요." "이 눈이 그 눈이야, 총각.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사람 눈이 이상하게 예뻐서 볼 때마다 마음이 물러진다니까. 근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세 달을 물러졌으면 이제 됐잖아." 말투는 여전히 정겨웠지만 내용은 단호했다. 할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냥, 더 이상 잘해줄 이유가 없어졌을 뿐이다. 호감도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더는 상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F급 스킬의 진짜 한계였다. 호감이 이미 가득한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만 남고, 실질적인 유예는 사라진다는 것. "사흘 안에 못 내면 짐 빼."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끼익. 끼이익. 이번엔 반대 방향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돈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은화 다섯 냥. 이 도시에서 방 한 칸 월세치고는 비싼 금액이었지만, 그렇다고 노동으로 벌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동은 나와 맞지 않는다. 이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배는 여전히 고팠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봤다. 은화 다섯 냥. 국밥이 한 그릇에 동화 삼십 냥. 환산하면 대략 국밥 백 그릇 값이다. 그걸 다 먹으면 배는 부르겠지만 방세는 여전히 없다. 계산을 하다 보니 더 우울해졌다. 계산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때 창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총각, 안에 있나?" 박덕수였다. 은월시 흑시장에서 노예 상인으로 밥벌이를 하는 중년 사내.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배가 나오고 콧수염이 삐뚤빼뚤 자란,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장사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사이였는데, 알고 지낸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그에게 종종 호감도 조작을 걸었고, 그는 그 대가로 이런저런 소식을 나눠주었다. 정확한 관계를 말하자면, 나는 그를 이용했고 그는 그걸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사이였다. "들어오세요." 나는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박덕수는 방 안을 한 번 훑어보고는 낡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자가 그의 체중을 견디며 삐걱, 낮은 소리를 냈다. 저 의자도 언젠가는 부서질 텐데 그것도 돈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네 얼굴이 왜 이래. 또 집세 문제야?" "뭐, 그렇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할머니한테 그 눈 기술 안 먹혀?" "먹혀요. 근데 이미 다 먹혀서 더 먹힐 게 없어요." 박덕수는 그 말을 듣더니 껄껄 웃었다. "그거 참 재밌는 소리네. 능력이 잘 통해서 문제가 생긴다니. 세상 그런 고민 하는 사람 자네밖에 없을 거야." "저도 이런 고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돈 벌 생각 없나? 요즘 노예시장이 아주 활황이야. 몬스터 웨이브 이후로 다들 값싼 전투노예를 찾거든." 그는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만지며 씩 웃었다. '이 아저씨, 또 뭔가 팔아먹으려는 눈빛이다.' 나는 경계했다. "저는 그런 거 살 돈도 없는데요." "사라는 게 아니라 팔라는 얘기지. 아, 자네 스킬 말이야." 박덕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호감도인지 뭔지 하는 그 능력 말이야. 그거 어떤 놈한테 걸면 진짜 반쯤 넘어가더라고. 요즘 시장에 그런 능력자가 귀해. 관리인 자리 하나 알아봐줄까? 노예들 다루는 데 그런 능력이 딱이지. 매질 안 해도 되고, 밥값도 아끼고. 자네한테도 나쁠 게 없는 자리야." "싫어요." 나는 단칼에 잘랐다. 관리인이라니. 그것도 노동이다. 노동은 나와 맞지 않는다. 세 번째로 되뇐 신념이었다. "왜 싫은데. 자네 능력 딱 그거 하라고 있는 능력 아닌가." "제 능력은 밥값 아끼라고 있는 능력이지 사람 부리라고 있는 능력이 아니에요." 박덕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집도 여전하네. 뭐, 좋아. 그럼 나중에 아쉬우면 흑시장으로 와. 요즘 재밌는 물건 하나가 들어왔거든." "물건이요?" "사람." 박덕수는 목소리를 낮췄다. "S급 모험가였던 년이야. '강철의 방패' 하윤. 이름 들어봤나?" 들어본 적 있었다. 은월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름이었다. 혼자서 오크 부대를 막아냈다는 전설의 방패병. 몬스터 웨이브 당시 성문 앞에서 홀로 버티며 시민들을 대피시켰다는 이야기는 술집에서 몇 번이나 안주거리로 오르내렸다. 나는 순간 흥미가 생겼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런 인물이 왜 흑시장에 나온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왜 거기 있어요?" "동료들한테 배신당했다더군. 뒤통수 세게 맞고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어. 지금은 뭐, 폐급이지." 박덕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그에게는 그저 상품 설명이었다. "어떻게 배신을 당했는데요." "자세한 건 몰라. 도적단인가 뭐 그런 거랑 얽혔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지금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벽만 보고 앉아있어. 방패 하나는 여전히 끌어안고 있더라만." 박덕수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값은 헐값이야. 그런 물건이 오래 남아있으면 나한테도 손해라서, 빨리 처리하고 싶은데. 자네 스킬이면 그거 좀 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한 거야." "관심 없다니까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흘려버렸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사흘 안에 은화 다섯 냥을 마련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여전히 막막했다. 박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툭툭 털었다. "그럼 나중에 봐, 총각. 마음 바뀌면 언제든 흑시장으로 오고." "안 바뀔 겁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는 문을 나서며 킬킬 웃었다. 끼익. 끼이익.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아까 할머니의 발소리와 겹쳐 들렸다. 오늘 이 방에 오간 사람만 둘. 그리고 둘 다 나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갔다. 하나는 돈, 하나는 노동. 둘 다 나한테는 없는 것들이었다. 박덕수가 돌아간 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상태창을 열었다. [호감도 조작 (F급)] 문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3년째 변하지 않은 F급. 레벨업도 없고, 진화도 없다. 다른 능력자들은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가 오르고 스킬이 진화한다던데, 나는 몬스터 근처에도 못 간다. 애초에 이 스킬로 몬스터를 잡을 방법이 없다. 오크가 나를 보고 호감을 느껴 순순히 배를 내밀 리는 없으니까. 이 스킬로는 밥값을 아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사실이 오늘처럼 뼈저리게 느껴진 날은 없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골목 어귀 가로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저 가로등도 며칠에 한 번씩 꺼지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요즘은 아예 반쪽만 켜진다. 이 동네가 딱 그런 동네다. 누구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모여 사는 곳. 사흘 후, 나는 이 방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답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낫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로 다독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흑시장에서 팔린다는 그 여자의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하윤. 왜인지 그 이름이 자꾸 귓가에 남았다. 강철의 방패라 불리던 여자가 폐급이 되어 벽만 보고 앉아있다는 이야기. 방패 하나는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는 그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은화 다섯 냥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 여자는 그냥 어디선가 들려온 소문 속의 이름일 뿐이다. 상관하지 않는 게 맞다. 상관할 여유도 없다.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천장의 곰팡이 지도를 보며, 나는 계속 그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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