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 서린은 이전보다 조금 더 자주 도현의 곁에 머물렀다.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고, 다정한 몸짓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그녀가 도현의 자리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빈도가 늘어난 건 반 아이들도 눈치챌 정도였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서린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매점에 가는 길에, 어쩌다 도현의 옆을 지나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우연은 반복되는 패턴이 되었고, 패턴은 곧 시선을 끄는 소문의 재료가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서린은 도현의 책상 옆 빈 의자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창밖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도현은 그 옆에서 문제집을 풀거나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들었는데,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나가던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쳐다볼 정도였다.
"진짜 뭐냐 요즘 둘이." 남하늬가 급식실에서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갈매기 같은 눈매가 더 날카로워 보였다. "사귀는 척이 아니라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식판 위 국그릇에서 김이 올라와 하늬의 얼굴을 가렸다가 흩어졌다. 도현은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멈췄다.
"그럴 리가." 도현이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부족했다.
"음." 하늬는 그 반응을 유심히 살피다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은 예민했고, 지금 캐물어봐야 얻을 수 있는 답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시선만 흘깃 돌려 서린이 앉은 자리를 보았다. 서린은 저만치서 태오와 짧게 말을 섞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
방과 후, 도현이 신발장 앞에서 운동화를 갈아 신는 동안 서린이 다가와 옆에 섰다. 특별한 목적 없이 서 있는 듯한 자세였는데도, 도현은 그 존재감을 지나치기 어려웠다.
신발장 특유의 냄새, 먼지와 낡은 고무가 섞인 냄새가 좁은 복도에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간간이 들려왔다. 도현은 운동화 끈을 묶는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왜 아까 태오한테 그런 말 했어." 도현이 신발끈을 묶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신경 쓰였어?" 서린이 반문했다.
"신경 쓰이지, 당연히." 도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넌 원래 이런 거에 나서는 성격 아니잖아."
서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었는데, 그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햇빛에 반사된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옅은 갈색으로 보였다가, 다시 원래의 짙은 색으로 돌아왔다.
"태오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야." 그녀가 짧게 답했다. "딴 이유는 없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방어인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 끝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꼈다.
도현은 신발끈을 다 묶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린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신발장 안쪽에서 누군가의 실내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음이 정적을 깨자, 서린이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먼저 갈게."
도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서린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은 오랜만에 예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중학교 2학년, 발표 수업 시간이었다.
교실 앞 칠판에는 그날의 발표 순서가 적혀 있었고, 도현의 이름은 세 번째였다. 앞선 두 명이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갈 때마다, 도현의 손끝은 조금씩 차가워졌다. 원고는 이미 몇 번이나 읽어서 외울 정도였지만, 교실 앞에 서면 그 문장들이 전부 흩어져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도현, 발표해봐."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도현은 교실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삼 분을 흘려보냈다.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속삭임. "쟤 원래 저래, 말을 못해."
그날 도현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는 땀에 젖어 가장자리가 눅눅해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교실 안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결국 도현은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자리로 돌아갔고, 그날 이후 몇 주간 발표라는 단어만 들어도 속이 뒤틀렸다.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좀 더 일찍 무언가 바뀌었을까. 아니, 아마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도현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던전 클리어처럼 여기게 되었고, 실패할 때마다 MP가 바닥나는 걸 느꼈다.
오늘 교실에서 태오가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때, 그 익숙한 무력감이 다시 찾아왔다. 몸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머릿속에서는 온갖 반박의 말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가지 않는, 그 감각. 태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리며 되풀이되었고, 반 아이들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 아직도 선명했다.
왜 항상 이런 순간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걸까?
도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골목 어귀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고, 도현의 그림자가 보도블록 위로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 동안, 도현은 아까 서린이 태오에게 던진 짧은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그녀가 대신 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집에 도착해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서린이었다.
[윤서린] 내일 아침에 일찍 나와. 할 얘기 있어.
짧고 명확한 문장. 그 아래로 이어지는 다음 메시지는 없었다. 도현은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켜고 끄면서,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가늠해보려 했다. 태오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까.
메시지 창을 열어 답을 쓰려다가, 도현은 몇 번이나 문장을 지웠다. "왜?"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한 글자조차 서린 앞에서는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도현은 짧게 [알겠어]라고만 적어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도현은 그 색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조용히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방 안의 조명을 켜지 않은 채, 노을빛만이 벽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도현은 내일 아침 서린이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해보려 했지만, 짐작은 곧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그 대화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리라는 예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