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사각지대

5화

체육대회 준비 기간이 시작되자 학교 전체가 한꺼번에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복도마다 걸린 현수막과 운동장에 그려지는 하얀 라인들, 그리고 방송실에서 흘러나오는 응원가 소리까지 겹쳐 평소보다 유난히 소란스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중에서도 아이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건 이번에 새로 추가된 수영 종목이었는데, 학년별 계주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 아이들 대부분은 눈을 반짝이며 벌써부터 순서를 정하자고 떠들어댔다. 나 역시 그 분위기에 섞여 대충 웃고 있었지만, 문득 시선을 돌렸을 때 민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굳는 걸 보고서야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너 수영 못 해?"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민호는 시선을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냥 안 하고 싶어." 그 목소리에 담긴 동요는 단순한 거부감 이상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대충 웃어넘기며 장난처럼 받아쳤을 민호가, 이번엔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괜히 문지르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걸 보자 나는 그 침묵의 결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뭔가 있구나.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 짧은 몇 초의 정적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반장이 명단을 짜는 동안 민호는 몇 번이나 손을 들어 빠지겠다고 말했지만, 담임은 전원 참여가 원칙이라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강민호, 이번엔 빠질 수 없어. 벌써 몸이 약한 애들도 다 참여하기로 했으니까." 그 말에 민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나는 옆자리에서 똑똑히 봤는데,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짙은 불안이 스치고 있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뭔가 더 말하려던 민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옆에서 괜히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체육 시간이 다가올수록 민호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급식 시간에도 밥을 반쯤 남긴 채 젓가락만 만지작거리는 날이 늘어갔다. 나는 그런 민호를 보며 며칠 전 탈의실에서 봤던 그 광경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민호의 상체에는 하얀 붕대가 여러 겹으로 단단히 감겨 있었는데, 그 순간 민호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옷을 끌어당겼고,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때 민호가 낮게 짓눌린 목소리로 내뱉었던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만약 수영복을 갈아입어야 한다면, 그때 봤던 그 붕대는… 그리고 그 얼굴은 어떻게 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불현듯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물속에 들어가면 붕대는 젖을 테고, 얇아진 천 아래로 드러날 실루엣은 감출 수 없을 텐데. 그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려오는 기분이었다. 수영 연습 당일, 탈의실은 유독 좁고 사람이 몰려 있었다. 습기가 잔뜩 낀 공기 속에서 아이들이 젖은 수영복을 서로 던지며 장난치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정신없이 울렸다. 민호는 다른 애들보다 먼저 들어가 구석 자리를 차지하려 했지만, 하필 그날은 반장이 인원 점검을 하러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강민호, 옷 갈아입었어? 빨리 나와야 순서 맞춰." 반장의 재촉에 민호는 다급하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는데, 손이 떨리는 게 커튼 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옆 칸에서 장난을 치던 다른 남학생 하나가 실수로 커튼을 확 잡아당겨버렸다.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순간 커튼이 활짝 걷히며 민호의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고,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던져 그 앞을 가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야, 뭐 하는 거야, 커튼 좀 조심해!"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린 사이 민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커튼을 붙잡았지만, 이미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뭐야, 방금 좀 이상하지 않았어?" 뒤쪽에서 낮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남학생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한 번 더 쏘아붙였지만, 이미 벌어진 균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보였던 민호의 등, 그 위로 축축하게 젖어 들러붙은 붕대의 흔적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호는 그날 이후로 아예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나는 그 곁을 지키며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창가에 붙어 앉아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민호의 옆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그냥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숨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모른 척해야 하는 걸까. 다음 날, 복도를 지나던 중 몇몇 여학생들이 모여 소곤거리는 소리가 귀에 걸렸다. "그거 들었어? 강민호 걔, 수영복 갈아입을 때 이상했다더라." "설마 진짜로…?" "몰라, 근데 뭔가 좀 그렇지 않아? 목소리도 그렇고, 체형도 그렇고." 그 대화를 엿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발걸음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걸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 애들이 정확히 뭘 봤을까. 아니, 뭘 안다고 저렇게 확신하듯 말하는 걸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소문은 이미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물이 스며들 듯, 처음엔 작은 웅덩이였던 것이 어느새 발밑을 다 적셔버릴 만큼 넓게 퍼져가는 느낌이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 나는 민호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도 비어 있었고, 가방도 그대로였는데 정작 사람만 사라진 듯한 그 텅 빈 공간이 이상하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화장실도, 복도 끝 계단도 살펴봤지만 민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게시판 앞에 모여 있던 다른 반 아이들 몇 명이 나를 향해 힐끗거리며 무언가를 속닥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 시선들 앞에서,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나에 대해서, 혹은 민호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걸까.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가시질 않았고, 나는 이 불안한 예감이 그저 예감으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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