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사각지대

1화

아침부터 된장국 냄새가 부엌을 채우고 있었는데,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도 설마 서연이가 나를 위해 국을 끓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배가 고프다는 생각만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한서연,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생긴 내 의붓여동생이자 같은 은강고등학교 1학년인 그 아이는 밝은 갈색 머리를 낮게 묶은 채 국그릇을 내 앞에 툭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는데, 그 삼각눈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보면서도 나는 별생각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이거 왜 내 것도 있어?" 묻자 서연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오빠 몫만 만들면 이상하잖아. 그냥 어쩌다 보니 많이 끓인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국그릇에 계란을 하나 더 풀어놓은 걸 보면 분명 신경을 쓴 게 맞을 텐데, 나는 그런 세심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국이 맛있다고만 생각하며 후루룩 떠먹었다. 서연은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식탁 옆에 서서 내가 국을 다 먹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지켜보는 눈치였는데, 그러다 내 시선이 향하면 재빨리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국 왜 이렇게 쳐다봐? 맛없어?" "누, 누가 쳐다봤다고 그래." 서연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걸 들으면서도 나는 그냥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릇을 싹 비우고 일어서자 서연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듯 어깨를 늘어뜨렸는데, 나는 그런 미묘한 변화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학교로 향하는 길, 서연은 늘 그렇듯 나보다 두어 걸음 뒤에서 걸었다. 같이 걷자고 하면 질색을 하면서도 결국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같은 골목을 지나고, 같은 신호등 앞에서 멈춰서는 걸 보면 그 애도 은근히 나와 함께 등교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간 또 한소리 들을 게 뻔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목 어귀의 편의점 앞을 지날 때마다 서연은 늘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슬쩍 확인하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가 다시 빨간불로 돌아가는 그 짧은 사이, 서연은 아무 말 없이 가방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서연이 요즘 반에서 어떤 남자애랑 어색하게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너 요즘 좋아하는 사람 없어?" 서연이 걸음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재차 물었을 뿐이었다. "없으면 없다고 해, 왜 말을 못 해?" 그러자 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는데, 나는 그 반응을 부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짚으며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이었다. 신호등 불빛이 서연의 얼굴 위로 붉게 번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게 신호등 색깔 때문인지 서연의 얼굴빛 때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괜찮아, 너도 언젠가 멋진 사람을 만날 거야." 그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뭔가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군가가 짝사랑으로 힘들어하는 걸 보면 늘 그렇게 말해주곤 했는데, 그건 나에게는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그런 말 좀 함부로 하지 마.' 몇 달 전 서연이 그렇게 쏘아붙였던 기억이 잠깐 스쳤지만, 나는 그때도 그냥 그 애가 예민한 시기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뿐, 그 말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고, 손에 쥐고 있던 가방끈을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뭐래." 짧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평소보다 훨씬 낮고 떨리는 목소리였다는 걸 나는 그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보다 먼저 빠르게 걸어가버렸는데, 그 뒷모습의 어깨가 유난히 작게 움츠려 있었다는 것도, 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불안정했다는 것도 나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 하며 별생각 없이 넘겼다. 신호가 바뀌고도 몇 초쯤 늦게 뒤따라 걸으면서, 나는 오늘 서연이 유난히 예민하다고만 생각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짝꿍인 윤지아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검은 롱스트레이트 머리를 넘기며 나를 향해 웃는 그 얼굴은 학년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남학생들이 줄줄이 고백했다가 죄다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정작 지아 본인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도윤아, 어제 숙제 했어?" 지아가 묻자 나는 가방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아, 깜빡했다." 그러자 지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기 노트를 슬쩍 밀어주었는데, 그 손끝이 내 손에 살짝 닿았다가 재빨리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그저 고맙다는 생각뿐이었다. 지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마음을 접은 듯 다시 노트로 눈을 내렸는데, 나는 노트를 베끼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미묘한 머뭇거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필기 중간중간 지아가 내 옆얼굴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저 답을 틀리게 적었나 싶어 다시 한번 노트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마주친 강민호는 여느 때처럼 큼지막한 원형 안경 너머로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걷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절친이자 유일하게 마음 편히 떠들 수 있는 상대였는데, 검은 울프컷 머리를 늘 눈썹 아래까지 늘어뜨려서인지 표정을 읽기가 쉽지 않은 녀석이었다. "야, 오늘 체육 뭐냐?" 내가 어깨를 툭 치며 묻자 민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축구." 그 순간 안경 다리가 살짝 흔들리며 옆으로 미끄러졌는데, 민호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다시 고쳐 쓰는 그 손짓이 어딘가 지나치게 예민해 보여서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도 민호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몸을 굳혔고, 그 반응이 평소와는 확실히 달라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왜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걸까. 그 순간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안경이 살짝 밀려 올라갔을 때 드러난 민호의 눈매가 평소보다 훨씬 또렷하고 낯설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자꾸만 머릿속에 남았다. 안경 너머로 늘 흐릿하게만 보이던 그 눈이 그렇게 짙은 갈색이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안경 새로 맞췄어?" 물어봤지만 민호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재촉했는데, 그 뒷모습에서 뭔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듯한 기색이 느껴져서 나는 더 이상 캐묻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가슴 한쪽에 걸린 채로, 나는 그날 오후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가는 민호의 뒷모습을 무심코 눈으로 좇고 있었다. 탈의실 문이 닫히기 직전, 민호가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한데, 그 표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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