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 사각지대

4화

며칠이 지나도 서연과의 어색한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서연은 시선을 슬쩍 피하며 지나쳤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자꾸만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도윤아, 누가 너 좋다고 하면 절대 모른 척하지 마. 그 마음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좋은 말로 응원해줘.'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문장 하나를 마음속 깊이 눌러 새겨버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자라났는데, 누군가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응원의 말을 건네는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것이었다. 그게 상대에게 어떤 상처가 될 수 있는지는 전혀 생각지 못한 채로 말이다. 어머니는 아마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 텐데. 그런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등굣길, 복도 모퉁이에서 반 친구인 박준서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이도윤, 잠깐 얘기 좀 하자." 준서는 다급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더니 인적이 드문 창가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준서가 지아를 좋아한다는 건 반 애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난 지 오래였는데, 평소엔 나와 별로 얽힌 적이 없던 그였기에 이 갑작스러운 접근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뭔데?" 내가 묻자 준서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게 뭔가 단단히 결심하고 온 사람 같았다. "너, 지아랑 짝꿍이잖아. 혹시… 지아가 너한테 뭐 특별한 말 한 거 없어?" 그 질문에 담긴 미묘한 긴장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는데." 그러자 준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며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게 보였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아… 그럼 다행이고." 준서는 애써 안심하는 척했지만 그 눈빛에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던 준서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 지아 좋아해. 근데 걘 나한테 관심도 없더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너 얘기할 때만 표정이 달라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뜨끔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작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에이, 그럴 리가. 우리 그냥 친구인데." 준서는 내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 팔짱을 낀 자세가 나를 어떤 벽처럼 밀어내는 듯 느껴졌다. "그럴 리가, 라니. 도윤아, 너 진짜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냉소적인 어조로 던진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도대체 다들 왜 나한테 그렇게 묻는 걸까. 서연도, 이젠 준서까지도. 나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대해온 것뿐인데, 왜 자꾸만 오해를 사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손끝으로 교복 소매를 슬쩍 매만졌다. 뭔가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정작 무엇을 해명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준서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아까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계속 지아한테 고백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괜히 걔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그 말에는 은근한 경고가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그냥 지아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인데." 그 순간 준서의 얼굴에 스친 표정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었는데,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어딘가 씁쓸한 패배감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준서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 쪽으로 걸어가버렸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에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그날 오후, 미술 시간이 되어 나는 지아와 짝지어 준비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통에 물을 받아 오고, 팔레트를 나눠 쓰며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그 시간이 평소엔 편안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준서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나는 붓을 헹구다가 문득 준서 이야기를 꺼냈다. "너 박준서 알지?" 묻자 지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물통에 담겨 있던 붓끝에서 물이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알지. 근데 왜?" 지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낮아진 걸 느끼면서도 나는 별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다리를 놓아주고 싶다는, 그 이상한 다짐 하나에 이끌려서. "걔가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한번 만나봐, 괜찮은 애 같더라." 그 말을 뱉는 순간 지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처진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좁아지며 나를 응시하는데,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단순한 불쾌함이 아니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손에 쥐고 있던 붓이 팔레트 위로 힘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지아가 낮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는 평소의 온화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서늘한 어조에 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말을 잃었는데,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비물을 챙겨 자리를 떠버렸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물통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유난히 크게 귓가에 남았다. 도대체 내가 또 뭘 잘못한 걸까. 그 물음이 가슴에 걸린 채로, 나는 지아의 뒷모습이 사라진 복도 끝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두 사람에게서 들은 말들을 하나씩 곱씹어보았다. 눈치가 없는 거냐고 묻던 준서의 냉소, 함부로 말하지 말라던 지아의 서늘한 목소리. 그 둘의 표정 속에 담겨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뒤척이다가 문득 서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연도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낮에 본 지아의 그 서늘한 표정만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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