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친선 시합이 열리는 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이런 날씨에 굳이 도장 밖으로 끌려 나온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왕실 후원의 시합장은 처음 와봤는데,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관전석만 몇백 석이 되는 것 같았고, 중앙에는 넓은 흙바닥 경기장이 자리했다. 기둥마다 새겨진 문양도 하나하나 금박이었다. 돈 지랄 보소, 눈이 즐겁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데다 돈 쓸 여유가 있으면 나 같은 무명 검사한테도 좀 나눠주지.
"오빠, 여기."
지우가 내 팔을 끌고 관전석 중간쯤 자리로 이끌었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거의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경야는 이미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늦었네."
"차가 막혀서."
"핑계는."
"진짠데."
나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굳이 더 말을 섞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그냥 구경만 하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목표였다. 모자라도 하나 챙겨왔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청화 가문 관계자와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다현과 마주치는 건 상상만 해도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 볼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마주친 순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냥 웃어? 아니면 모르는 척? 시뮬레이션만 백 번은 돌린 것 같은데 답이 안 나왔다.
다행히 다현은 오늘 참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관전석에 청화 가문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다현 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에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시합이 시작됐다.
여러 가문의 검사들이 나와서 실력을 겨뤘다. 대부분 익히 아는 이름들이었다. 나도 예전에 한두 번 겨뤄본 적 있는 상대들도 있었다. 첫 번째 대결은 그럭저럭 볼만했고, 두 번째는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올 정도였다.
"저건 좀 심했다."
경야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실력 차가 저 정도면 시합을 왜 붙였을까 싶네."
"명분 채우기지 뭐."
지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데 세 번째 대결이 시작되자, 관중석 전체가 순간 조용해졌다.
경기장 한쪽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를 보고, 나도 잠깐 숨을 멈췄다.
은발.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마치 달빛을 그대로 잘라 붙인 것 같았다. 흰 갑주 위에 걸친 푸른 망토가 걸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고, 손에 든 검은 화려하지 않지만 실전용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장식 하나 없이 오로지 쓰기 편하게 벼려진 검. 저런 걸 들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력에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설란국 왕녀님이야."
지우가 작게 속삭였다. 목소리에 묘하게 흥분이 섞여 있었다.
"이하람. 소문에는 마법 대신 검술로 승부하는 게 특기래."
"왕녀가 왜 검을 들어?"
내가 묻자 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그냥 그 집안이 좀 특이하대. 왕족인데 마법보다 검을 더 좋아한다나."
왕녀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몸놀림은 실전을 겪은 사람의 것이었다. 상대 검사와 맞붙는 순간, 그 움직임을 보고 나는 확실히 알았다. 저건 그냥 배운 검술이 아니었다. 몸에 새겨진 검술이었다. 이론으로 익힌 사람과 실전으로 다져진 사람의 차이는, 그냥 서 있는 자세만 봐도 티가 난다.
세 번의 교차, 한 번의 회피, 그리고 결정적인 반격.
순식간에 상대 검사의 무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졌고, 누군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나는 그냥 조용히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관찰자로만 남으려고 했는데, 어쩐지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끌렸다. 검을 쥔 손목의 움직임, 발끝의 무게 이동,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직업병인가.
"저 정도면 진짜 실력자네."
경야가 낮게 감탄했다.
"오빠보다는 약한 거 같은데?"
지우가 슬쩍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었고, 이런 자리에서 튀는 발언은 딱 사양이었다.
승부가 끝나고 이하람이 검을 거두며 관중석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이었다.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착각이겠지. 관중이 몇백 명인데, 하필 나를 봤을 리가 없다. 자리도 딱히 눈에 띄는 위치가 아니었고, 옷차림도 최대한 평범하게 맞춰 입고 왔는데.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몇 초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오빠 왜 그래."
지우가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착각이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 되뇌었지만, 뭔가 이상한 예감이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마치 물에 잠긴 돌처럼, 가라앉지 않고 계속 신경을 긁는 예감이었다.
시합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도 나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 그 은발 여자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왜 나를 봤을까. 아니, 정말로 나를 본 건가. 아니면 그냥 내 뒤에 앉은 누군가를 본 걸까.
네 번째 대결, 다섯 번째 대결이 이어졌지만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누가 이겼는지, 어떤 기술을 썼는지, 다 흐릿하게 지나갔다. 머릿속에는 그 몇 초간의 시선만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오빠, 시합 끝났어. 가자."
지우가 어깨를 두드렸을 때,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관중들이 하나둘 일어나며 자리를 뜨고 있었다. 시합장 전체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짐을 챙기고, 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고 뛰어다녔다.
"경야는 어디 갔어?"
내가 묻자 지우가 두리번거리더니 대답했다.
"저기 아는 사람 만났나 봐. 먼저 가자, 오빠."
나도 서둘러 일어나 관전석을 벗어나려 했다. 그저 얼굴 한 번 비치고 조용히 사라지려던 계획대로, 이제 도장으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오늘 하루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슬며시 올라왔다. 다현도 안 보였고, 눈에 띄는 사고도 없었고, 이 정도면 성공적이지.
그런데 출구를 향해 걷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서두르지 않는, 오히려 여유가 넘치는 걸음걸이였다.
"저기요."
낯선 목소리였다. 낭랑하면서도 어딘가 위엄이 서린 목소리. 딱 한마디인데도 묘하게 사람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경기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은발의 여자, 이하람이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압도적이었다. 큰 키에, 흰 갑주 위로 흐르는 은발이, 마치 그림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이하준 씨, 맞으신가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여자가 왜 내 이름을 알고, 왜 지금 이 순간 나를 찾아온 건지, 그 어떤 것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란국 왕녀랑 내가 무슨 연결점이 있을 리가 없는데.
옆에서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이하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오빠, 아는 사람이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제 조용히 살겠다는 내 다짐이, 시작하기도 전에 무너지고 있다는 것.